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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신용목의 「소사 가는 길, 잠시」 평설 / 임승빈

Beyond 정채원 2025. 11. 10. 09:37

 

 

소사(素砂) 가는 길, 잠시

 

신용목(1974~)

 

 

시흥(始興)에서 소사(素砂) 가는 길, 잠시

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췄을 때

 

건너 다방(茶房) 유리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내 얼굴 속엔 손톱을 다듬는, 앳된 여자

머리 위엔 기원(棋院)이 있고 그 위엔

 

한 줄 비행기 지나간 흔적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는 오후,

차창에도 다방 풍경이 비쳤을 터이니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을 다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당신과 나는, 겹쳐져 있었다

 

머리 위로 바둑돌이 놓이고 그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2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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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에 어두운 나는 시흥과 소사가 어딘지 모른다. 그 거리가 얼마나 되고 어떤 내력을 지닌 곳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난 신용목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를 읽은 후로는 버스만 타면 자동으로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 잠시’를 뇌리 속에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 잠시’라고 나도 모르게 입속으로 되뇌곤 했다.

   얼마나 먼 거릴까. 시간은 얼마나 걸리고, 차창을 흐르는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그래도 서울은 아니니까 가끔은 철도 건널목도 지나고, 미루나무 끝에 걸린 저녁노을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긴 2000년대인데도 찻집이나 카페, 또는 커피숍이 아니라 다방인걸 보면, 앳된 여자가 손톱을 다듬는 한가로운 풍경인 걸 보면, 아직은 아날로그 식 정경이 남아있을 것도 같아 보인다.

   시흥에서 소사를 가는 길에 잠시 신호에 걸려 버스가 멈췄을 때, 무연히 내다본 건너 다방 유리에 시적 자아의 얼굴이 비쳐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소사 행은 공적인 업무 때문은 아닐 것이다. 지극히 사적이고, 어쩌면 논리적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엉뚱하기 짝이 없는 여정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표정은 마른 표정이다. 마른 표정은 무미건조한 것이다. 어떤 일에 몰두해 있거나, 특별한 감정이나 정서에 빠져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무연한 눈길도 가능하고, 오랜만에 보기가 만만치 않은 다방도, 그 안의 앳된 여자의 모습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차창 유리와 다방 유리를 통해 그 앳된 여자와 겹쳐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버스에 앉아 있는 내 얼굴이 건너 다방 유리에 비쳤다는 표현은 왠지 억지스럽다. 버스 차창에 내 얼굴이 비친 것은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버스 안의 내 얼굴이 건너 다방 유리에 비쳤다는 건 아무래도 확인이 불가능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표현한 것은 사실보다는 논리적인 유추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차창에 비쳐 있는 내 얼굴 속에 다방의 앳된 여자의 얼굴이 겹쳐 있는 거니까, 내 얼굴 또한 다방 유리에 비쳐 있을 수도 있을 거라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녀와 내가 겹쳐 있었다는 사실이다.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 어느 신호등 앞에서 버스가 멈췄을 때, 버스에 앉아 있는 시적 자아의 얼굴 속에서 건너편 다방의 앳된 여자가 손톱을 다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머리 위엔 기원이 있고, 또 그 위는 하늘. 그래서 그녀의 머리 위엔 햇살이 비듬처럼 내리고, 바둑돌이 놓이고, 그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걸 나는 알고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 얼굴 속에서 손톱을 다듬는 그녀 때문에, 나도 그녀의 얼굴 속에 앉아 마른 표정이나마 다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자. 이 시에서 말하는 시흥에서 소사 가는 길은 어떤 길일까. 그 길에서 우리는 누구를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어디쯤을 가고 있는 걸까. 그 어디쯤에서 누구와 겹쳐지고, 누구와 지금 멀어지고 있는 걸까.

   아니, 결국 우리는 지금 시흥이라는 이승에서 나서 소사라는 내세를 향해 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가는 이승(현세)의 어디쯤을 잠깐 멈추어 서서 새삼 주변을 돌아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식은 커피 잔, 탁상시계, 만년필, 안경, 창밖 미끈한 모과나무, 그네를 타고 있는 아이까지 갑자기 톺아 보이는 건 아닐까. 와락 겹쳐지는 건 아닐까.

 

 

 《딩아돌하》 2025 가을호, 「연민憐憫 톺아진 일상」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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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빈 / 충북 보은 출생. 1983년《월간문학》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아버지는 두릅나무 새순만 따고』『분리된 꿈』『속초행』『하늘뜨락』『흐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