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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네 번째 서랍

[스크랩] 나는 달을 믿는다/ 박형준

Beyond 정채원 2015. 7. 19. 10:10

[ 제13회 유심작품상 시부문 수상작 ]

 

나는 달을 믿는다

 

  박형준

 

 

 

달에 골목을 낼 수 있다면 이렇게 하리,
서로 어깨를 비벼야만 통과할 수 있는 골목
그런 골목이 산동네를 이루고
높지만 낮은 집들이 흐린 삼십 촉 백열전구가 켜진
창을 가지고 있는 달
나는 골목의 계단을 올라가며
집집마다 흘러나오는 불빛을 보며 울리라,
판잣집을 시루떡처럼 쌓아올린 골목의 이집 저집마다
그렇게 흘러나오는 불빛 모아
나는 주머니에 추억 같은 시를 넣고 다니리,
저녁이 이슥해지면 달의 골목 어느 집으로 들어가
창턱에 떠오르는 지구를 내려다보며
한 권의 시집을 지구에 떨어뜨리리라,
달에는 아직 살 만한 사람들이 산다고
나를 냉대했던 지구에
또다시 밝아오는 아침을 바라보며 오늘도 안녕
그렇게 안부 인사를 하리라,
당신이 달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지을 때
혹은 꿈꾸거나 기쁠 때
달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분화구들이 생겨나지,
우리가 올려다 본 달 속에 얼마나 많은 거짓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슬픔이 있는지
그 거짓과 슬픔 속에서 속고 속이는 것이
얼마나 즐거웠던 것인지
나는 달의 분화구마다 골목을 내고 허름한 곳에서 가장 높은
판잣집의 저녁 창마다 떠오르는 삼십 촉 흐린 불빛으로 
지구를 내려다보며 울리,
명절날,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고향집 툇마루에서
저 식지 않을 투명한 불꽃을 머금고
하늘 기슭에 떠오른 창문을 바라본다
그렇게 달의 먼지 낀 창문을 열면
환한 호숫가에 모여 있는 시루떡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리

 

 


                  — 《작가세계》 201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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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91년 〈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빵냄새를 풍기는 거울』『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춤』『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불탄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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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볼펜 몇 개로 지층을 오르는 강인함

 

 

   

박형준 시인

박형준 시인은 내가 재직하던 대학에서 강의한 적이 있었다. 학생들에게 박 시인을 소개하면서 별로 미남은 아니지만 인간적으로 잘 생겼고 시도 그렇다고 한 적이 있다. 지금도 틀리지 않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박 시인이 섭섭해 할지 모르나 정확한 소개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처음 박 시인을 만났을 때 마음이 쓰였다. 손해만 보고 제대로 밥을 먹고 살 것인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결과는 좋은 시인 노릇에다가 교수도 되고 하는 것을 보면 아주 숙맥은 아닌 것 같다.

 

모든 인간사에서 구부릴 줄 알지만 자신의 희망이나 시의 본령에서는 구부리지 않는 직선 의지도 그에게 있어 보인다. 그의 어설픈 웃음이나 싱거운 표정 속에 얕볼 수 없는 꼿꼿한 힘이 있다.

 

특히 박형준의 시는 ‘진심’이라는 줄기에서 흐르는 맑은 샘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시의 본령을 그는 단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어 보인다. 신춘문예 당선작 〈가구의 힘〉에서부터 〈나는 달을 믿는다〉까지 그는 시를 자기 밖에서 가져온 적이 없다. 울리지 않으면 다가가지 않는 시의 성품은 결국 진정성의 주역이 된 것이다. 나는 박형준의 시에서 ‘지층’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그가 높은 빌딩의 주인이 되더라도 이 지층의식의 시심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은 시는 모든 사물을 우러르는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층의 창으로 나무의 끝을 보는 시심은 단단한 희망을 만들어 낸다. 그는 단지 볼펜 몇 개로 지층을 오르는 내적 강인한 힘을 보여주는 시인이다. 

그의 시심은 속절없는 것에 끌리고 울 수밖에 없는 인간적 마음에서 떠나지 못한다. 늦은 밤 길바닥에 몇 개의 물건을 펴 놓고 파는 어설픈 여자의 쓸쓸함을 시로써나마 해결하지 못하면 그의 밥숟가락도 느리게 움직이는 약한 심성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다. 그래서 그는 너무 많이 울고 너무 많이 사랑해서 지층의 습기를 다 말리느라 시라는 햇살을 가져오는 것일 게다. 그런 햇살로 그는 우뚝 서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 유심작품상을 수상한 〈나는 달을 믿는다〉 역시 그런 과정을 모두 담고 있다.

 

      달에 골목을 낼 수 있다면 이렇게 하리,
      서로 어깨를 비벼야만 통과할 수 있는 골목
      그런 골목이 산동네를 이루고
      높지만 낮은 집들이 흐린 삼십 촉 백열전구가 켜진
      창을 가지고 있는 달
      나는 골목의 계단을 올라가며……

 

지구에 떨어지는 시집 한 권은 지구를 살릴 힘이 있어야 한다. 박형준의 시집은 지구에서 떨어뜨려도 깨지지 않고 원형을 지니며 영원히 갈 것이다. 그것이 시인의 정신이며 유심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심사위원/ 오세영·신달자(글)

 

    

   

       —《유심》2015년 7월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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