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그, 그림자 /정채원

Beyond 정채원 2015. 12. 4. 14:31

 

 


그, 그림자
                                        
                                                            

   눈보라가 쏟아졌어요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요 눈보라였다가 빗물이었다가, 흠뻑 젖어 한참을 헤매다 높은 담장을 만났지요 이상하리만치 높다란 담장 위에는 붉은 꽃이 가득 피어 있었어요 불타고 있었지요 담장 너머로 사람들이 보였어요 그 높은 담장 너머가 어찌 그리 잘 보였던 걸까요 수초처럼 흐느적거리는 사람들 사이, 한 여자는 자꾸만 어디가 아프다고, 어딘지 모르지만 아픈 곳이 꼭 있다고 가슴을 문지르고 있었지요 키만 훌쩍 큰 한 아이는 한 손으로 제 코를 잡고 허우적대고 있었어요 물속에서 숨 쉬는 방법을 배운 사람 있나요 물 위를 걷던 사람도 있었나요 옆의 남자는 자기 발밑만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그의 그림자는 흔들리다간 우뚝 멈춰 서곤 하였지요 빗속에서도 눈보라 속에서도 선명하던 그림자들, 그곳은 아무리 젖어도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는 곳, 문득 그가 얼굴을 들어 나와 눈이 마주쳤나 했는데, 그 순간 나는 후루룩 빨려간 듯했지요 캄캄한 눈을 뜨니 나도 담장 안에 있었어요 도저히 내 키론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담장, 안에서 보니 담장 위의 꽃은 모두가 가시였어요 피로 꽃을 피운 가시울타리 속,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알 듯 알 듯 끝까지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 노래, 웅얼웅얼 한참을 따라부르다, 울다 지쳐 얼굴을 들어보니 나만 홀로 담장 밖에 서 있었지요 어디선가 갑자기 바람 한 줄기 불어왔어요 하늘도 땅도 경계가 지워진 채 캄캄하게 뻥 뚫린 벌판, 아무리 까치발을 해도 담장 안이 보이지 않았어요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다시 그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답하지 않았어요

 

   바람 속을 한참 홀로 걸었어요 어쩌다 구름 걷히고 햇살이 빛나는 길, 한결 짙어진 그림자만 내려다보고 걷는 길, 누가 얼핏 다녀갔는지 내 그림자가 가시에 찔린 듯 잠시 꿈틀했어요

 

 

 

 

『시와세계』2015년 겨울호

'밤의 네 번째 서랍'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겨울 대육각형 - 시인의 삶/ 조연호  (0) 2015.12.16
소풍/정채원  (0) 2015.12.04
조장鳥葬/박진성  (0) 2015.11.15
매미/박수현  (0) 2015.11.15
푼크툼, 푼크툼/정숙자  (0) 2015.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