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보관
정채원
너를 가두어야 해 잠금장치가 이중으로 단단한 압축팩이 필요해 미세먼지도 악몽도 후회까지도 막을 수 있는 특수 팩이 필요해 내 안의 서랍에 납작하게 쟁여 넣어야지 버리려 해도 내쫓으려 해도 지울 수 없는 나, 몇 십 년 묵어 유행도 지난 나를 곰팡이 끼지 않도록 진공상태로 보관해야 해 긴 울음 끝, 그녀에게 찰싹 붙어 떨어져나가지 않는 딸꾹질도 차곡차곡 접어 넣어야지 저잣거리를 헤매던 슬픔들을 혼자 있는 밤이면 내 안으로 불러 모으듯이
고흐의 가면을 쓰고 압셍트를 마시며 친구가 제 코를 베어 갔다고 소리치던 K도 죽었다 K가 P의 애인이었나 묻던 Y도 죽었다 K가 두고 간 가면에 구멍을 뚫고 그 위에 카프카의 가면을 덧씌우던 P도 죽었다 곁에서 그 모습을 보고 붉으락푸르락하던 S도 죽었다 S를 말리던 J도 죽었다 울던 사람도 죽었고 눈 흘기던 사람도 죽었고 웃던 사람도 죽었고 하품하던 사람도 죽었다 아이스크림을 먹던 사람도 죽었고 자전거를 타던 사람도 죽었다 다 죽었다
십 년이 가도 백 년이 가도 압축보관된 사람만 죽지 못했다 진공상태로 납작하게 구겨진 채 남아 있다 죽은 사람 속에서도 이따금 꿈틀거린다 언젠가 누가 나를 풀어주겠지 풍선처럼 빵빵하게 살려내겠지 다시 커피를 마시며 너를 씹으며 조각난 표정을 꿰맬 수 있겠지 역장이 깜빡 조는 사이 잠금장치가 풀린 환생역 9번 출구로 나가면
『미네르바』2017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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