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자각夢, 정채원

무음시계/정채원

Beyond 정채원 2018. 6. 8. 22:11

무음시계


정채원


겉모양 화려한데 잉크가 나오지 않는 볼펜들

필통에서 한 자루 잡히는 대로 잡는다

너는 깨어날 것이다, 죽지 않을 것이다

글자가 써지면 너는 회생이다

겨우내 얼어 있던 연못이 봄이면 꽃나무를 받아쓰듯이


시계는 오늘도 소란하게 죽어간다

두 개의 바늘을 제 살에 꽂고

신음소리, 째깍째깍

구름에 매달린 링거는 보이지 않아도

나날이 수액이 줄어들고, 수명이 줄어들고


시간이 마르는 소리에 잠 못 이루는 밤

혼자일수록 더 잘 들리는 시간의 들숨과 날숨

시간 너머로 시간을 보내도

시간의 검은 문은 어김없이 열리겠지

소리 없이 신음하는 자가

더 아프겠지, 피가 마르겠지


잉크가 마르고 있다

써지지 않는 볼펜을 꾹 꾹 눌러 쓴다

잉크 없이 쓰는 글자가

더 선명하다, 지워지지 않는다

기억 너머로 기억을 보내도

기억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툭 툭

피어나는 봄꽃을 막을 수 있나


호스피스 병동의 창밖에도

살구꽃 앵두꽃 수수꽃다리

피 흘리며 째깍거린다, 소리 없이

봄이 마르는 소리



『예술가』201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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