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사고
정채원
아무도 문을 열지 않는다
벨을 한 번 더 누르는 대신
작은 상자를 두고 떠난다, 택배기사는
8동과 9동 사이로
꿀항아리를 주문한 8동 403호
주인은 상자를 열고 한 숟가락 퍼먹는다
내가 입이 쓴가, 입맛이 변했나
꿀맛이 왜 이리 쓸쓸할까, 씁쓸한
해골바가지를 퍼먹으며 한없이 빠져든다
무슨 꿀맛이 이리 바닥이 없나, 캄캄하게 달고 깊은가
사후세계를 주문한 9동 403호
주인도 상자를 열고 한 숟가락 퍼먹는다
말기암이라 입맛도 길을 잃었나
안경을 쓰고 퍼먹어도 역시 달콤하다
이정표를 꼭 들여다 볼 필요는 없다
보지 않아도 묻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퍼먹어도 퍼먹어도 꿀맛인 세계
죽어서도 수저를 놓을 수 없는 세계
너는 다른 세계로 잘못 배달된 것인가
나는 나를 잘못 찾아온 것인가
잘못 든 길이 끝내 발목을 놓아주지 않는다
오늘도 택배기사는 벨을 누른다
아무도 문을 열지 않는다
말없이 상자를 두고 떠난다
상자가 바뀌거나 주인이 죽거나
상자가 죽거나 주인이 바뀌거나
오늘의 배달은 무사히 끝났다
『시사사』2018년 5-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