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자각夢, 정채원

배달사고/정채원

Beyond 정채원 2018. 5. 29. 11:39

배달사고


정채원



아무도 문을 열지 않는다

벨을 한 번 더 누르는 대신

작은 상자를 두고 떠난다, 택배기사는

8동과 9동 사이로


꿀항아리를 주문한 8동 403호

주인은 상자를 열고 한 숟가락 퍼먹는다

내가 입이 쓴가, 입맛이 변했나

꿀맛이 왜 이리 쓸쓸할까, 씁쓸한

해골바가지를 퍼먹으며 한없이 빠져든다

무슨 꿀맛이 이리 바닥이 없나, 캄캄하게 달고 깊은가


사후세계를 주문한 9동 403호

주인도 상자를 열고 한 숟가락 퍼먹는다

말기암이라 입맛도 길을 잃었나

안경을 쓰고 퍼먹어도 역시 달콤하다

이정표를 꼭 들여다 볼 필요는 없다

보지 않아도 묻지 않아도 갈 수 있는 길이 있다

퍼먹어도 퍼먹어도 꿀맛인 세계

죽어서도 수저를 놓을 수 없는 세계


너는 다른 세계로 잘못 배달된 것인가

나는 나를 잘못 찾아온 것인가

잘못 든 길이 끝내 발목을 놓아주지 않는다


오늘도 택배기사는 벨을 누른다

아무도 문을 열지 않는다

말없이 상자를 두고 떠난다

상자가 바뀌거나 주인이 죽거나


상자가 죽거나 주인이 바뀌거나

오늘의 배달은 무사히 끝났다



『시사사』2018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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