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스트 하우스
박상수
목수국 가득한 언덕길을 지나왔어 떨어진 잎들을 모았다
가 조금씩 불면서 왔어 작게 말하고 적게 숨쉬는 조랑말이
풀을 뜯는 들판, 들판을 지나 다시 뾰족한 숲을 지나 절벽을
걷다가, ‘그녀는 마침내 어디로 가야 할지를 잊어버렸다’는
문장이 머물러 있는 곳, 목책 위로 기울어가는 마지막 햇빛
이 남아 있었어 들이마셨다가 내뱉고 다시 들이마셨다가 겨
우 숨을 내뱉으면 곤충의 다리 같은 빛살이 눈을 멀게 만드
는 곳, 시간이 느린 롤러코스터를 타고 멀어지고 있지 어떻
게 해, 내가 이렇게 작아지고 있어, 차가운 잔디가 자라고
시간이 흐르고, 분홍 담요가 찢기고 또 찢겨서 그 사이로 시
간이 흐르고, 갇혔던 새들이 하늘로 날 때마다 쪽가위가 날
갯죽지를 잘라내고 있었지 창가의 나무 덧창이 요동치며 부
서져내렸어, 멍든 조랑말들이 절벽을 향해 걸어가고 있구나
그렇게 하지 마, 소리 내어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어 전지도
없는 군악대 인형들이 큰북을 울리며 행진하고 있었지 거기
로 가지 마, 소리도 없이 숨도 없이 잡아당겨도 빠져나가는
것들, 파도, 절벽, 절벽, 파도, 파도, 파도, 파도 ……
문학동네 시인선 109 『오늘 같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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