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
안희연
손을 달라고 했더니 척 발을 내민다.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나를 골똘히 들여다보는, 너는 머리끝부
터 발끝까지 새카만 영혼이구나. 어쩐지 오늘은 개에게까지 나를 들킨 것 같다.
오늘은 바람도 나를 함부로 읽었지. 머리칼이 흩날릴 때, 밤송이처럼 후드득 떨어진 내가 있고.
그것은 감춰둔, 겉만 뾰족한 알맹이. 나를 줍기 위해 다가가면 저만치 굴러가 버린다.
없다고 믿으면 그만일 조각들이야. 새들이 자유롭다고 말하는 건 인간의 높이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무
스*는 초식동물이지만 몸무게가 300킬로그램이나 나가지. 온순한 눈망울과 날카로운 이빨을 동시에 가
진.
집으로 돌아와 곡차를 끓인다. 물의 색이 변하는 것을 바라보며 나를 둘러싼 세상의 온도를 살핀다. 내
가 나여서 우러날 수밖에 없는 시간이 있다고.
빛을 거느린 사람들이 창밖으로 지나간다. 비밀이야 다시 품으면 될 일. 끓일수록 진해지는 것을 나라
고 믿으면 될 일이다.
* 사슴의 한 종류. 말 정도로 큰 동물이지만 덩치에 걸맞지 않게 부드러운 풀을 즐긴다
『시인동네』 2018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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