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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네 번째 서랍

[스크랩] 소피아 로렌의 시간 (외 2편)/ 기혁

Beyond 정채원 2018. 12. 14. 13:40

소피아 로렌의 시간 (2)

 

   기 혁

 

 

 

   이곳은 모래 위에 지어진 집이지만, 방바닥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이면 약간의 현실이 묻어 나온다.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수도 있고 불어터진 면발을 드미는 배달원에게 주소의 허구성과 결제의 진정성에 대해 물을 수도 있다. 머리카락을 건지며 국물의 양심에 대해 투덜거리던 친구, 고데기로 말 수 있는 내용이 생각보다 짧다는 애인을 만날 수도 있다. 애인을 사랑한다면 약속은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말려드는 것이라는 생각. 이곳은 모래 위에 지어진 집이지만, 그릇을 내다 놓으면 정오의 부재를 담을 수도 있고 쌓여가는 부재를 내려다보며 유년의 담배 연기를 입에 담을 수도 있다. 한 마리 사막여우가 지나간다면 연기는 약간의 현실보다 수다스러울 것. 일요일의 앞마당을 파면 사람이나 들짐승의 머리뼈를 볼 수도 있다. 해골에서 전갈이 나올까 봐 불안하지만, 해골과 전갈 중에 어느 것이 더 무서운지 내 머리는 알지 못한다. TV 속 미라가 자신의 머리카락에 휘감겨 있고 나는 백 년 뒤 자랄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다. 입술을 통과하지 못한 말들이 두피를 꿰뚫는 밤이면 누군가의 현실도 검고 구불거린다. 이곳은 모래 위에 지어진 집이지만, 모래가 다 흘러내린 257초마다 뒤집어진다. 당신과 나의 기다림이 처음 천장을 만들었을 때 유리관을 왕복하는 모래가 보였다. 사막여우는 길들이는 것보다 발달시키는 편이 낫다. 나처럼 아무도 썩지 않은 당신이 사상누각으로 서 있다
 


 

 * 1934년 여름 스웨덴의 고고학자 폴크 베르그만(Folke Bergman)은 타클라마칸 사막을 탐사하던 중 머리카락과 눈썹이 그대로 보존된 청동기 시대의 미라를 발견한다. 중국에서 발견된 백인 미라로서 소하공주(小河公主) 혹은 소하미녀(小河美女)라고 알려졌다. 그녀의 가슴팍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치즈 덩이가 안겨 있었다. 같은 해 가을 이탈리아 영화배우 소피아 로렌이 태어났고, 후대의 연구자들이 미라에 배우의 이름을 딴 별명을 붙였다. 그녀의 배우자가 사망한 현재까지도 소피아 로렌은 생존 중이다




남반구

 

 

 

저 눈이 마다가스카르 앞바다에서 태어난 구름이라고 생각하면
희망봉 설산의 용을 만난 것 같고, 용을 타고 날아가 스리랑카 홍차로 목을 축인 것도 같고, 인도차이나반도의 거북 껍질로 점괘를 얻은 것만 같다.

숨소리 낭랑한 지붕 위에서 팔짱 낀 중년의 머리끝에서 꾸벅꾸벅 여백을 옆에 앉힌 아가씨에게도
세계의 모든 모서리마다 이부자리를 까는 숫눈.

인도양 너머 동글동글한 새벽이 오면 발자국을 찍을 수 있을까?
종점에 두고 온 꿈결들을 깨울 수 있을까?

팡팡팡 한국산눈물이 쏟아진다. 우리는 마다가스카르 펭귄처럼 고개를 들고 눈사람의 진심을 그리워한다.

그가 믿었던 중력에 대하여
되돌아갈 팔과 다리에 대하여

목적지가 얼어붙은 환승 센터에 가면
당신도, 나도 갈 곳이 있다는 거짓말.

마다가스카르에는 고향이 없다.
동지(冬至)라고 부르는 투명한 일들과
남반구를 떠올리는 가정법이 있을 뿐.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수평선으로 감아 놓은 실타래

해질 무렵의 실낱을 풀어

종이컵을 매달면

파도

파도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아침의 안부

 

오늘도 바벨의 욕조 속에선 가장

중립적인 표정의

물방울이 떠오르고

이념의 왼쪽과 오른쪽

늘 한가한 기준과

기준 너머 분주함 속에서도

 

당신의 텍스트는 썩고 있다

천사를 본 수신자들과 함께

뼈에서 뼈로 전도되는

돌고래의 초음파가 섹시하게

들릴 때

어떻게 직전이라는

해변을 거닐 수 있을까?

파도

파도

실타래를 뚝뚝 끊으며 전진하는

호화 여객선

그 상형문자의 객실을 열어젖히며

 

진실은 종이컵을 내려놓는다

중국에 가면

말을 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시집 소피아 로렌의 시간(2018. 1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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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혁 / 1979년 경남 진주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졸업.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10년 계간 시인세계신인상 시, 2013세계일보신춘문예 평론 당선. 시집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소피아 로렌의 시간이 있다.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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