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믹소포비아(mixophobia)의 시간/고광식

Beyond 정채원 2019. 4. 30. 20:00



믹소포비아의 시간

 

 고광식

 

 

 

자세를 바꿀 때마다

잘린 대가리가 도마 밑으로 굴러가 섞인다

차례가 가까워질수록 칼날은 더욱 섬뜩해진다

여자는 꿈틀대며 파고드는

칼날의 통증을 서로 다른 주머니에 넣는다

 

생선 토막에서 흘러나온 노을이 미끄럽다

일몰이면서 일출인 좌판 위로

햇볕에 말라비틀어진 파도 조각이 얹힌다

도마는 칼자국이 선명하여 오히려 편안하다

시퍼런 칼날에 맺힌 파도가

우럭, 광어, 도미의 지느러미를 잡는다

 

갯골은 산도를 열어 칼날 위에 선다

섞이지 않기 위하여 이름을 부른다

여자는 자꾸만 펄떡이는 파도를 하나씩 토막 낸다

너희는 서로 낯을 익히며

,

다르더라도 죽음을 함께 맞이하며

, ,

벌어지고 있는 바다의 가랑이를 외면하며

, , ,

 

노을 묻은 칼날은 언제나 예리하고

먼 바다는 붉은 이비야(耳鼻爺)처럼 출렁인다

도마 위 꼬리지느러미를 따라 아가미가 씻겨나간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갯골이 뱀처럼 뜨겁게 구부러진다

 

시퍼런 칼날을 좌판 너머로 본다

바다를 기억하는 눈알들이 뒤섞여 뒹군다

칼을 행주로 닦는

소래5호 여자가 웃는다

낯선 지느러미들로 어시장은 질퍽거리고

잘리며 하나가 된 대가리들이

차례대로 5호 여자의 자궁 속으로 숨어든다

 

밀물이 들어오는 포구가 피범벅이다

갯골이 구부러진 파도를 화투장처럼 섞기 시작한다

 

 

⸺⸺⸺⸺⸺⸺⸺⸺

* 믹소포비아(Mixophobia) : 낯선 것과의 뒤섞임에 대한 공포증

 

 



계간 문학청춘201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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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식 / 1957년 충남 예산 출생. 1990민족과문학시 등단. 2014서울신문신춘문예에 문학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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