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이불
정동욱
축축한 육체가 자취방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림자도 들어오지 못할 어둠이
깨진 유리병처럼 깔려 있었다.
어제 닦아낸 축축한 하루들은 마르지 않고
샤워실 하수구에 실뱀을 낳았다.
실뱀은 허공에 습한 오르막길을 타고
내 코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게거품이 날 때까지 이를 닦아도 뱉어내지 못한 것들은
기억이 되었다.
아무렇게나 벗어둔 아침은 찡그린 수의가 되어 있었다.
그것을 입을 때면
창틈에 턱을 괴고 기다리던 새벽들이 내 발에 손을 녹이곤 했다.
나의 이불 속엔 내 발이 녹을 자리가 마련돼 있지 않았다.
무언가 시작하긴 늦고 포기하긴 아쉬운 시간,
잠은 자살에 가까웠다.
눈을 감으면 벽지의 이음새마다 풀칠이 벗겨졌다.
그 사이로 허물을 벗은 뱀들이 기어 나왔다.
내 귀를 갉작이던 것들이 천천히
내 몸을 조르기 시작할 무렵
나는 타인의 이불에서 자는 꿈을 꾼다.
타인의 이불에서 내 것이 아닌 머리카락을 주우며
내 것 아닌 발에 발을 녹이던 나는
그러나 어느새 목이 졸리는 상상을 한다.
포엠포엠에서 주목하는 젊은 시인들28,『포엠포엠 201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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