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가지
한영수
하다못해 색이라도 보여줘야 했습니다
솟구치는 빙벽에 맞불을 지르는
시작이 필요했습니다
상공 이십 미터 화분은
내가 만든 사랑의 좁은 장소였습니다
꾸물거리는 빛을 이끌어 색을 밀어올린 나는
흔들리는 꽃대였습니다 식어버린 채송화 나팔꽃 옆에서
아무튼 사랑에 기생해야 했습니다
사랑의 식물은 간단하지 않아
보여줬다 금방 얼굴을 가리고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자연이지
머뭇거리다가도 깊은 곳을 찾아 실뿌리를 내렸습니다
찬물을 정성껏 마시고
이것일지도 모른다고 고집했습니다
모두가 겨울이라고 말할 때
아니오, 고개를 젓는 꽃대
피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황이 얼비치는 녹색
녹이 얼비치는 황색
이런 것도 색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스무 번을 생각한 끝에
생각 같은 것 치워버린 그대로
겨우살이 맹목이었습니다
꽃의 미래를 살피느라 그저
호흡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서정시학』201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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