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인형의 편지
정채원
비통하지도 비열하지도 않은 이 거리
구겨진 거울 뒤에 숨어
발뒤꿈치나 반쪽, 혹은
이어폰 꽂은 한쪽 귀나 슬쩍 보여 줄 뿐
심장이나 콩팥은 처음부터 없는
플라스틱 물광 피부나
이따금 랜덤으로 깜빡이는 속눈썹이 있지
흔들림을 모르는 눈동자 위에서
순종밖에는 모른다는 듯
입력된 악보에 따라 건반을 누르던 18세기 인형처럼
지치지도 않고 하품도 모르는 무한 반복은 아니지만
죽은 딸과 꼭 닮은 인형을
여행할 때도 품고 다녔다는 데카르트가
이해될 때도 있지
태엽을 감고 정교한 톱니바퀴를 돌려도
운명을 우그러뜨릴 순 없다고, 아니
누가 먼저 고장 나는가 그건 순전히 우연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다 가끔 한숨도 쉬며
글씨 쓰는 인형들이 밤새워 편지를 쓰지
해답을 찾지 못하고
과부하가 걸린
인형들이 좌회전 우회전 좌충우돌
거울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꽃피는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순간
장막 뒤에서 졸며 페달을 돌리던 신이
드디어 호루라기를 불며 등장하신다
극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계간『파란』201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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