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한 북쪽
조정인
불가측 그늘의 나라, 부재를 제곱하면 무성해지는 당신
길의 전면으로
폭설이 들이쳐 상제나비 날아간 방향을 놓치고 마네
촛대를 들고 허물어진 사원 뒤뜰을 걷네 부재의 그림자
일렁이는 돌담장 세 겹, 성근 그늘 귀퉁이를 당겨 불꽃에
사르면 무슨 빛깔 재가 남나
염료를 구하러 온 눈먼 염색공
수런거리는 어스름 속으로 나는 스며들어
차가운 촛농이 발등에 떨어지네, 모든 색들의 불꽃은 메
아리로 흩어져라
가늘게 떠도는 한숨, 흰빛만 남아
손끝에 만져지는
고요를 사른 보드라운 재
색과 소리, 모든 몸짓과 말의 바탕이던
당신이 두고 간 마지막, 텅 빈 색을 상자에 담아 왔네
떠난 뒤에 무성해지는 사람이 있네, 왼발 엄지발가락 발
톱이 비어
내 안의 검은 악기를 타는
시집 『사과 얼마예요』, 민음의 시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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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고여 있는 이 순간들, 섭리의 솟구침은, 너무나도 눈이 부셔, 차마 주시하는 게 가능하지 않은 하얀 극점과 같을 것이다. (...)
컴컴한 어둠에 불을 사르며, 사른 불꽃이 지는 순간처럼, 오히려 너무나 컴컴해서, 보았다고 해도, 그 사실조차 알아챌 수 없는, 오로지 시계를 지워 낸 자의 눈에만 포착되며, 오로지 시계를 벗어난 자에게만 그 드러남을 허용할지도 모른다. 시인은 "당신이 두고 간 마지막, 텅 빈 색"(「무성한 북쪽」)을 열고 들어가, "색과 소리, 모든 몸짓과 말의 바탕"이었던 언어의 사원을 매만지며, "염료를 구하러 온 눈먼 염색공"이 되어, 매일, 그리고 매일 밤, 시를 고치고 또 고치면서, 죽음을 체험하는 문자를 깁고, 지독한 고독의 숨결에 새로운 문장을 불어넣는다. 시인은 이 문장이 "끝내 완성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다.
조재룡 문학평론가 해설, 「섭리의 뼈와 살, 소립자의 거처」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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