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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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정진혁 시집(파란 시선 0052)

Beyond 정채원 2020. 4. 12. 13:34

  퍼즐, 사람


  정진혁


  종종 퍼즐이 맞춰지지 않았다

  하루가 마구 흐트러지고 뒤섞였다

  퍼즐 속의 귀를 못 찾은 날도

  입을 잃어버린 날도

  코를 엉뚱한 곳에 끼워넣은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저 속으로부터 지독한 냄새가 올라왔다


  장마에 집이 홀딱 잠겼던 날

  아부지 퍼즐이 잘 맞지 않아요

  보세요 퉁퉁 불어서 딱 맞물리지 않아요

  무슨 말이니?

  무슨 그런 멍청한 말을 하니?

  너무 부풀어서 온몸이 아픈 나처럼요

  이 집에 너보다 안 아픈 사람은 없다

  네 엄마 다라 이고 시골 다니며 생선 파느라 관절염 와도

병원 한 번 못 갔다

  아부지는 다리가 찢어지도록 페달을 밟아 걸을 힘도 없다


  퉁퉁 불은 퍼즐을 말려 억지로 맞춰 본다


  재개발사업으로 동네가 모두 헐린단다

  이사 갈 집도 없다

  퍼즐 조각들이 투둑 바닥에 떨어졌다

  퍼즐 조각을 주워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서 맞추었다


  지긋지긋하게 맞지 않았다

  퍼즐은 몇 개가 비어 있었고 그 구멍에 까맣게 어둠이

차 있었다


  거리를 걷다가 보도블록 빠진 자리에

  검은 고요가 보인다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이 거기 있었다


 


  

   역설적 유전자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유전이 아닐까

  나는 '희미한'이란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희미한은 내 DNA에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다


  아버지는 막걸리 한 주전자를 마셔도 희미했고

  빨랫줄에 널린 색 바랜 팬티처럼

  모든 약속도 희미했다

  11월 봉숭아 물든 손톱처럼

  누가 욕을 해도 희미했고 누가 돈을 떼먹어도 희미했다

  색을 잃어버린 백일홍 꽃잎처럼


  아버지 때문에 슬플 일은 없을 것이다

  희미한 아버지


  희미한 유전자 덕분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나도

  사람들은 저녁연기처럼 기억하지 못할까


  그러나 너무 희미해서

  또렷한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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