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게나 사랑이
김병호
크루아상처럼 접힌 어둠을 뒤적이면
새로 생긴 주저흔이 반짝거립니다
맡겨놓고 찾아가지 않는 푸들 같습니다
뒤꿈치에 붙인 반창고가 자꾸 밀립니다
모서리 없는 계단에서 미끄러진 슬리퍼 탓입니다
이런 날은 자면서도 발끝을 오므립니다
꿈에서도 말을 더듬습니다
문법이나 행간 없이도 이해되는 친절한 악몽입니다
꿈이 길지 않으니 내일쯤 당신이 당도하겠다 싶습니다
한쪽만 들리는 이어폰을 끼고 눈을 감으면 간신히 슬퍼집니다
거짓말을 할 때마다 혀를 씹는 버릇 탓입니다
속도 없이 커브를 도는 심야버스처럼 당신이 덜컹거립니다
제발, 내려주세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달래고 타일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본래의 뜻과 당신이 멀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사랑이 어디인지 묻지도 않습니다
계간 《시와사람》 202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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