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위에 장미
그리스 메테오라 공중 수도원에서 사 온
둥근 계피로 만든 작은 십자가
진홍색 연분홍색 조그만 조화 장미가 송글송글 맺혀 있어
식탁 옆 하얀 벽에서는
장미꽃 닫혔다 열리는 떨림이 간혹 느껴지고
5월 장미 동산에서도 맡지 못한 향기 속에
무겁게 매달려 있는 풀지 못한 문제에서
뚝뚝 비어져 나오는 고뇌가 껍질을 찢는
장밋빛 피 내음이 번지기도 한다
절벽에 간신히 막을 디딘 공중 수도원에서
밧줄에 의지해 오르내리던 수도사들은
절연과 접속을 반복하며, 살아서
인간을 벗어버릴 수 있음에 도전한것일까
수직의 암벽 저 아래 저녁이 되면
불빛이 따뜻한 사람의 마을을 내려다보며
아니다 아니다 저곳은 아니다
혹은 한걸음 더 오르리 오르리를 다짐했을까
치솟은 수직의 바위에서 보낸
한 생애의 흔적이
희게 바랜 유골들로 남아있는 그들도
죽어서야 인간을 벗어버렸겠지
작은 계피 십자가 위 조화 장미
유치한 듯 장엄한 듯
그러나 무슨 차이인가
십자가를 목에 걸든 등에 지든
십자가 없는 삶은 없을 테니
말없이 바라보곤 한다
밤이 깊어지자 짙은 어둠 속에
바위는 안 보이고 까마득한 높이
수도원의 불빛만 별빛처럼 아득한
메테오라 공중 수도원
오스만 터키의 침공 때엔
아무도 오르지 못하는 피난처였다는데
수도사들은 공중마저도 벗어나고자 했으리라
안경원 시집 《십자가 위에 장미》, 현대시학 기획시인선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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