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문
하늘이 말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장맛비에 꽃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진흙을 뚫고 수련이 말문을 열었다
과묵을 늘상 달고 다니던 아이가
아기아빠가 된 것 만큼이나
저 수다스러움은 위대하다
살아 있다고 소리치는 거
꽃이 잠깐 한 눈 판다한들,
내가 엄마를 찢고 나와 처음 말문을 열었을 때
엄마도 그랬으리라
공원묘지의 봉분들, 말문을 닫은 그 이유라는 거
알고 보면 거기서 거기다
정선 비행기재를 지나는데
한여름 적요 속 터널이 속사포를 쏟아내고 있었다
살기 위해 죽을 힘 다하는 폭포수처럼
고요라는 평형수가 터널의 말문을 닫아버린다
언젠가 말이 문을 닫을 때
그때를 위해 문장 하나는 남겨놓아야 한다
한 줄 휘갈겨 쓴 번개처럼
김지헌 시집 《심장을 가졌다》, 현대시학 기획시인선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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