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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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첫눈입니까/이규리 시집

Beyond 정채원 2020. 12. 18. 15:21

저녁의 문

 

서풍은 서쪽으로 부는 바람 아니라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 하나

 

그냥 다 서풍만 같다

 

이파리 뒤에 숨은 열매가 말라가고 있을 때

어느 쪽으로 가느냐고 너는 물었다

 

마른 덩굴은 끝내 팔을 풀지 않고 생을 마쳤는데

그 안은 비어 있었고

 

어느 쪽으로도 갈 곳이 있지 않았다

 

거미는 거미를 사랑하고

벌새는 벌새를 부르고

 

그렇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말라가던 열매가 빨갰는지 어땠는지 너는 다시 물었지만

그 말도 비어 있었다

 

떠나는 일이야말로 서쪽이었는데

 

그토록 아프다 하면서 세계는 변하지 않는 것이지

 

꽉 낀 팔을 풀어주고

 

어느 쪽으로 가는지

어느 쪽에서 왔는지

 

꼭 다문 입술 어두워지는 문밖으로

 

다만 서풍이라 싶은 것이다

 

 

   당신은 첫눈입니까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

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

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

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

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이규리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