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문
서풍은 서쪽으로 부는 바람 아니라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 하나
그냥 다 서풍만 같다
이파리 뒤에 숨은 열매가 말라가고 있을 때
어느 쪽으로 가느냐고 너는 물었다
마른 덩굴은 끝내 팔을 풀지 않고 생을 마쳤는데
그 안은 비어 있었고
어느 쪽으로도 갈 곳이 있지 않았다
거미는 거미를 사랑하고
벌새는 벌새를 부르고
그렇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말라가던 열매가 빨갰는지 어땠는지 너는 다시 물었지만
그 말도 비어 있었다
떠나는 일이야말로 서쪽이었는데
그토록 아프다 하면서 세계는 변하지 않는 것이지
꽉 낀 팔을 풀어주고
어느 쪽으로 가는지
어느 쪽에서 왔는지
꼭 다문 입술 어두워지는 문밖으로
다만 서풍이라 싶은 것이다
당신은 첫눈입니까
누구인가 스쳐지날 때 닿는 희미한 눈빛, 더듬어보지만
멈칫하는 사이 이내 사라지는 마음이란 것도 부질없는 것
우린 부질없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않
으면 모르고 지나친 일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낱낱이 드
러나는 민낯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날 듯 말 듯 생각
나지 않아 지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모르는 사람을 붙들고
더욱 부질없어질 뻔하였다 흩날리는 부질없음을 두고 누구
는 첫눈이라 하고 누구는 첫눈 아니라며 다시 더듬어보는
허공, 당신은 첫눈입니까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이규리 시집 《당신은 첫눈입니까》, 문학동네 시인선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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