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자각夢, 정채원

전신거울 파는 곳/정채원

Beyond 정채원 2021. 1. 2. 17:49

전신거울 파는 곳

 

 

코를 비추면 무릎이 지워지는 아침나절과

옆구리를 비추면 머리가 사라지는 저녁

 

겨우 얼굴과 상반신만 비추는 거울이 걸린

현관을 지나

 

밖엔 태풍주의보

우산을 써도 우산을 쓰지 않아도

전신이 젖을 때

 

이 도시에 불시착한 사람들은

보송보송하던 날들을 떠올려야 할까

마냥 쏟아지는 비를 즐겨야 할까

 

살이 부러진 우산을 여전히 움켜쥔 채

패잔병처럼 비를 피하러 들어선 곳이

전신거울을 파는 곳이라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숨고 싶어도 숨을 곳이 없다

타인의 눈동자 속에서

살이 부러진 표정이 번들거리고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물을 뚝뚝 흘리며 들어서도

반신은 숨길 수 있는 곳

젖은 손을 비추면 부르튼 발을 숨겨주고

구겨진 셔츠를 벗으면 뜨거운 미역국을 한 대접 내어주는

 

 

《열린시학》 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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