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자각夢, 정채원

정채원의 「진화론 P」평설/박성현

Beyond 정채원 2021. 4. 14. 23:43

   진화론 P

 

    직립보행을 시작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중 발굽이 있는 돌연변이들이 살아남아 후손을 이은 게 시인이 되었다. 단숨에 수 천 년 전 풀밭으로 달려가기도 하고, 떠나간 애인의 가장 깊숙한 우물까지 숨어 들어가 보기도 하지만

 

    발굽을 숨긴 채

    끝 모를 만장굴을 키우는 자들

 

    동굴 밖으로 나가려고 동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며 손톱으로 긁은 벽화가 더러 발견되기도 한다. 불긋한 핏자국 같기도 한 그것.

 

    제 안에 키우는 동굴 속, 이따금 빗물이 스며드는 날이면 어디론가 끝없이 달려가는 발굽소리 들린다. 뜻 모를 신음소리만 내는, 얼굴도 본 적 없는 괴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라는 신을 만들어 냈다고도 하는

 

    꿈보다 수상한 해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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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에는 수많은 영역들이 존재한다. 살아감의 ‘실존’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정립되는 것인데, 이 ‘관계-맺음’의 각 영역들이 삶의 구체적 시간과 장소에 작용하면서 개별자들의 불안과 공포, 안도와 부끄러움 등의 기분을 만들어낸다. 더욱이 현실을 구성하는 사물들의 배치를 바꾼다면 얼마든지 낯설고 불가해한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익숙함은 그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까닭 없는 공포로 즉각 돌변한다.

   때문에 ‘현실’이란 시인이 정확히 판단하는 것처럼 ‘양가성’(ambivalence)의 세계다. 가벼우면서도 상당히 무겁고, 부드러우면서도 거칠기만 한 ‘늪’(혹은 ‘수렁’) 이미지를 강하게 내포한다. 이러한 이유로 현실은 항상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 작용을 통해 정립되며, 그 양상은 우리가 예측한 설계와 의도에 균열을 내고, 그것을 벗겨내는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계열화된다. 시인은 맥락을 수용하면서도 어느 틈엔가 그 맥락을 사건에서 제거한다. 그러다 보면 남는 것은 순수한 사건 그 자체인데, 바로 여기가 정채원 시인의 문장이 산출되는 곳이다.

   요컨대, “제 안에 키우는 동굴 속, 이따금 빗물이 스며드는 날이면 어디론가 끝없이 달려가는 발굽소리 들린다. 뜻 모를 신음소리만 내는, 얼굴도 본 적 없는 괴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詩라는 신神을 만들어 냈다고도 하는 // 꿈보다 수상한 해몽”(「진화론 P」)을 내놓는 것이지만, 시가 신으로 향하는 순간 문장에서의 시간은 멈추고 공간도 풍화되기를 거부한다. 그는 문장의 시점을 이동하거나 주어를 감춰두는 것만으로도 ‘고양이 없는 미소’의 ‘체셔 고양이’를 실현하는 것이다.

   시인이, “발굽을 숨긴 채 / 끝 모를 만장굴을 키우는 자들”(「진화론 P」)으로서 이 행성(혹은 도시)에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날마다 몰아치는 무수한 사건에서 신체를 사라지게 하듯 그 맥락을 제거하면서 사건을 순수한 흐름 그 자체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의 문장은 현실의 재현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자유롭게 흘러 사람들의 심장에 닿을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정채원 시인이 우리에게 던진 시의 화두가 아닐까.

 

 

《열린시학》 2020년 겨울호, 정채원 시인 시평 - 박성현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