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온도와 습도
정채원
장기는 전부 제거하고
화학 목욕을 시켰지
불그스레 좋은 혈색은
내가 바라볼 때만 그런 걸까
뒷거울에 비친 그는 늘 푸른 얼굴
푸르게 죽어 있으면서
푸르게 살아 있지
2천 년 전 죽은 여인의 탄력 있는 피부를 만져본 그 때처럼
애도는 적정 온도와 습도를 지켜야 해
기억의 내벽에 구멍을 뚫고 등잔을 켜놓았어 불빛에 벽화가 어른어른
밤새 내 안을 긴 다리로 걸어다녔지
아침 햇살이 등잔을 훅 불어 끄기 직전까지
바람 부는 밤이면 벽돌을 한 장씩 빼어내, 어느새 두 장이 세 장이 되고,
벌어진 틈으로 불멸이 살며시 드나들 수 있을 때까지
그 틈으로 하얀 향훈이 새어나올 때까지
슬픔이 그 입김에 몸을 숨길 수 있을 때까지
내 장기는 다 빼내고 뇌만 남겨 두었지
화학 목욕을 시키지 않아도
기억은 썩지 않아
뒷거울로 보면 뒤통수가 늘 푸르게 살아 있지
푸르게 죽어 있지
연금술사
눈을 뜬 채 한잠 자고 나면
읽던 책 몇 페이지가 금으로 변하는 날이 있었어
그러나
울다 잠든 다음날 아침이면
그 자리엔 표지가 구겨진 책 한 권이 놓여있었지
반쯤 타다만 책을 끼고
비오는 거리를 걸어 다녔어
죽음처럼 다정한 빗방울
불타는 빗방울
옷걸이처럼 목이 꺾어진 빗방울
세상의 뒤통수가 두 개로 다섯 개로 보이는 날
비에 젖은 책장을 넘기다 잠든 다음날
밤새 노랗게 불탄 머리카락이
금실금실
베게 위에서 기어 다녔지
토스터에서 방금 튀어나온 따끈한 태양을 향해
《포엠포엠》 202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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