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널
터미널이 시키는 대로 침묵했다
눈물이 가자는 곳으로 보내 주었다
고요가 가리키는 오후 여섯 시까지의 기록
회전문 세 번째 칸에 걸려 있는 돌멩이를
두 동강이 난 마지막 인사를
흩어진 음성의 투명한 입자들을
교통카드에 끼워 맞췄다
가방의 지퍼를 열고 무언가 찾는 듯
푸른 가죽 속 꽃송이버섯이 단단하게 잡혔다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라는 듯
터미널은 마침표가 아니라 말줄임표로
전광판 위 백 개의 행선지로 깜빡깜빡 흘러갔다
진료기록부에 적힌 라면 부스러기 같은
Terminalㅡ 뒤의 철자를 읽었어야 했는데
단추를 잠그는 시간에
한마디는 더 할 수 있었는데
짧은 꿈이 오목렌즈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들숨을 굴절시키고 있었다
어둠에 불을 붙여
눈 밝은 미토콘드리아를 추적하듯
슬픈 혀는 아픈 사람의 일생에 달라붙었다
세븐일레븐에서 튕겨 나온 김밥 냄새가
쿵, 쿵, 레지스탕스 발자국으로 쫓아왔다
마지막 버스가 시키는 대로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벙커
시계 반대 방향으로 어둠이 지나갔다
어둠의 보폭은 한 뼘, 두 뼘 조금씩 환해지는 것
벽을 짚고 헤드폰을 쓰고
우리는 흙의 자세로 바닥에 누워
석류가 터지는 소리를 기록했다
비밀이 있던 자리에 빛을 침투시키면
백 개의 물이 금빛으로 흘러갔다
흑연을 껴안고 서 있는 시간의 기둥
지우개 밥보다 가볍게 흩어지는 죽은 약속의 입자들
사과꽃은 벽 속에서 말문이 트였다
옹알이에서 나온 첫말, 눈부셔
캄캄한 에코로 집을 지으며 빗소리도 들었지만
곤충도 절지동물도 자라지 않았다
천장은 낮고 전깃줄은 스물두 개
입구와 출구를 찾는 법은 햇빛 냄새를 따라가는 것
녹슨 자물쇠를 더듬으며 나비를 풀어 주고
어둠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를 밟으며
우리는 새벽까지 수맥을 따라갔다
바닥은 빛을 다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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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원은 시집에서 '벙커'라는 폐쇄 공간과 '날짜 밖의 요일'이라는 초월적 시간을 제시한다. 먼저 '벙커'라는 공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벙커는 적의 사격이나 관측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구축하는 지하 요새다. 어둡고,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우며, 안전하다. 시집에는 '어둠'이라는 단어가 14번이나 등장한다. 한정원의 벙커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어둠이 지나"가는 시간 역행의 장소이자 "곤충도 절지동물도 자라지 않"는 무중력 공간, 현실 세계의 질서가 적용되지 않는 초현실 세계다. 화자는 벙커 안에서 "녹슨 자물쇠를 더듬으며 나비를 풀어"준다. 자물쇠가 상상을 억압하는 초자아의 상징이라면, 자물쇠를 열어 '나비'를 풀어 주는 행위는 자유로운 시적 몽상의 은유다. "비밀이 있던 자리"이자 "석류가 터지는 소리를 기록"하는 벙커는 상상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진 시인의 내면세계인 것이다.
해설 「벙커 속의 시인」 이병철(문학평론가)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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