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섬
안희연
배가 출발하자마자 속눈썹이 얼어붙었어.
이 세상 추위가 아니구나.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비겁해 보여도 할 수 없다고 이쯤에서 생각을 끊어내려 했는데
본섬은 이미 점처럼 작아진 지 오래였고 배는 계속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어. 이 여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너를 살리고 싶다는 생각이 고이고 고여 바다를 이루고 한 척의 배를 띄웠다는 거.
이 배엔 조타실이 없고 발로는 올라탄 흔적이 없다. 무엇이 배를 움직이는 걸가. 내릴 수 없다는 걸 알고 나니 꺼내줄 사람을 기다리게 되더라. 그런 존재가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수평선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바다와 하늘의 구분이 의미 없어지는 때가 오고, '새는 북쪽으로 갔다'고 적었다가 '새가 날아간 곳이 북쪽이다'라고 고쳐 쓰는 일을 그만두게 돼. 그런 말장난은 반쪽짜리 믿음일 뿐이라고.
자다 깨다 자다 깨다. 무엇이 배를 멈출 수 있을까. 어떻게든 너를 찾아 본섬으로 되돌아가고 깊은데 이제 그곳은 눈을 감으면 큰불로 타오를 뿐이야.
안 그래도 잔잔한 바다가 간밤엔 더 고요했어. 숨소리조차 시끄러울 만큼. 어둠 속에서 뒷걸음질 치다 무언가를 밟았는데. 뭘 봤고, 뭘 밟았을까. 그 후론 배고픔을 모르게 되었어.
손가락을 움직이면,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설, 이곳이 너의 나라이구나. 4월이 끝났을 뿐인데 세상이 끝나버린 기분이 들어.
계간 《시산맥》 202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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