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얼굴
너의 얼굴이 지나간다 한때는 지나가는 얼굴이 아니라 내게로 다가오는 얼굴이었던 너의 얼굴이 숱한 낯선 얼굴들처럼 나를 지나간다 지나가는 것들은 언제나 그 뒤에 화염을 남긴다 그 화염에 휩싸여 본 나는 이미 새까만 잿더미 더 이상 불붙을 곳이 없다 한 번 잿더미로 견뎌본 사람은 안다 그 자리엔 새싹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한사코 지나가기만 하는 너의 얼굴은 수많은 시인들의 자책 속에서 소모되어 나오는 슬픈 시들처럼 죽은 얼굴이다 죽은 얼굴은 평온과 자유를 준다 모든 세상이 잠들었을 때 일어나 태양이 뜰 때 사라지는 얼굴들처럼 너의 얼굴은 나를 지나 더 먼 곳으로 사라진다 알에서 깨어나 훨훨 날아오르는 새들처럼 이제 내 가슴에 남은 너의 얼굴은 없다 영원히 종적을 감추었다
우리들의 얼굴 찾기 2 《너의 얼굴》, 한국시인협회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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