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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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도 되겠습니까/한영수 시집

Beyond 정채원 2022. 7. 31. 23:58

 

선정릉

 

잠깐 울었다 미래가 생겼다

스무나무 연두는 지나갔어도

 

무덤은 부풀어 오른다

둥글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길이를 가졌다

죽었어도 그날 손목의 시계처럼

 

정확하게 살아나는 한때가 있다

 

메추리나 까투리가 지나간 게 아니었다

시작이 있었고 너는 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아직

우리는 세계였다

 

 

 

고독이 온다

 

 

시시포스가 온다

시발시발이 온다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 오 층으로

 

올리고 올리고

걸어 내려가 다시

들어 올려야 하는 바위

택배 덩어리가 온다

 

오늘의 기온은 체온을 초과하고

아무리 걸어도 끝장을 볼 수 없는 거리

자신의 미궁을 향해

아니오, 세 번도 더

뱉어 내는 비명

 

뭉개진 눈코입이 온다

온몸이 온몸을 밀면서 온다

계단만으로 만들어진 집

무릎을 굽히며 막고 있다가도

한번은 터져 나오고야 마는

불립문자

 

시발 한 덩어리가 온다

혼자서 온다

무쇠문 현관 틈새를 벌리며

차마 받을 수 없는 두 손은

그만 도망치려 하는데

 

밤보다 더 밤 같은

한여름 한낮이 온다

머리도 꼬리도 없는 고독이

고독을 밀어 올린다

 

 

한영수 시집 《피어도 되겠습니까》, 파란시선 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