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자유로이, 쓰고 싶은 글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그러니까, 무슨 결연한 의지가 있어서가 아니라 요청에 호응하다 보니 얻게 된 결과물이다. 문예지에 발표한 글을 추려서 묶고 들여다보니 공통점이 있었다. 어떤 현상과 보통은 잊고 지내는 주변부의 존재를 망라한 실존에 관한 관심이 문장을 견인하고 있었다. thing에 속하는 본질에 다가가려는 시도는 다른 종(種)과도 연계된다. 그것은 장미와 여우가 나누는 인사말이요 ‘있음’에 대한 고고학이다. 현상과 실존에 말을 거는 언어 바깥이며, 언어보다 먼저인 무엇이다.
의미가 축조한 관념의 세계는 인간을 틀 잡는다. 틀에서 성장한 자의식이 제 모태인 의미를 낯설어한다. 그것에의 순응은 무엇이며 의아심은 무엇인가? 골똘해진 자의식이 외출을 서두른다. 언어와 문자에 포섭당하지 않는 바깥은 아이러니하게도 언어와 문자, 그리고 수사법을 수단으로 삼는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가 되어주는 그것은 아침이슬 같은 직관에서 실을 잣는다. 옷감을 짜고 날개 없이도 창공을 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리고 싶어 하는 일종의 크레파스다.
비약을 가능하게 하는 그것은 수사학과 상징, 전설과 신화 그리고 불립문자이다. 더하여 기호와 그림자로 드러나는 어법은 너머의 세계를 홀로그램으로 얼비친다. 물질의 현현인 things의 본질은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이념과 이해의 눈으로 수렴된다. 들음으로써 받아적을 수 있었던 문장은 혼잣말을 사랑했다. 어릴 적 처마 밑에서 빛과 그림자가 대련하는 앞마당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어린 동공에 맺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피사체가 문장이 되었을 것이다. 공기의 방식을 선호하는, ‘있음’의 세계를 항해하는 하얀 쪽배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2022년 7월
정재분
의미가 축조한 관념의 세계는 인간을 틀 잡는다. 틀에서 성장한 자의식이 제 모태인 의미를 낯설어한다. 그것에의 순응은 무엇이며 의아심은 무엇인가? 골똘해진 자의식이 외출을 서두른다. 언어와 문자에 포섭당하지 않는 바깥은 아이러니하게도 언어와 문자, 그리고 수사법을 수단으로 삼는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가 되어주는 그것은 아침이슬 같은 직관에서 실을 잣는다. 옷감을 짜고 날개 없이도 창공을 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리고 싶어 하는 일종의 크레파스다.
비약을 가능하게 하는 그것은 수사학과 상징, 전설과 신화 그리고 불립문자이다. 더하여 기호와 그림자로 드러나는 어법은 너머의 세계를 홀로그램으로 얼비친다. 물질의 현현인 things의 본질은 벌거벗은 임금님으로 이념과 이해의 눈으로 수렴된다. 들음으로써 받아적을 수 있었던 문장은 혼잣말을 사랑했다. 어릴 적 처마 밑에서 빛과 그림자가 대련하는 앞마당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어린 동공에 맺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피사체가 문장이 되었을 것이다. 공기의 방식을 선호하는, ‘있음’의 세계를 항해하는 하얀 쪽배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2022년 7월
정재분
다만 본능에 따라 사는 매혹과 달리 본능만으로 살 수 없는 실존의 압력 아래 처한 인간에게도 밤은 위안이다. 타인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공적 세계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공적인 공간에서는 서거나 앉아 있을 것을 요구받지만, 밤은 기대든 눕든 어떤 자세든 개의치 않는다. 가장 편한 자세는 눕는 것이다. 누울 때 뇌와 감정이 원활해진다. 이를테면 떠오르지 않는 글이 술금슬금 탄력을 받는 식이다. 뒤엉킨 생각들이 갈피를 잡고 스스로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아마도 내면의 물꼬가 터지는 것은 결박의 한 양상인 옷을 벗기 때문일 것이다. 유니폼과 같은 사회적 요구를 벗고 본연을 만나기에 가장 적합한 밤에 비로소 존재는 조건을 망각해도 좋다. 여섯 개의 다리로 은유된 생의 비애를 잊어도 좋다.
1부 「침묵으로 말하는 낮과 밤」중에서
정재분 산문집 《푸른 별의 조연들》, 달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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