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時에서 0時 사이
ㅡ 둥근 밀떡에서 뜨는 해
김길나
들녘을 훑고 지나간 바람 끝에서
밀밭 몇 장이 구겨졌다 구겨진 밀밭이
서녘으로 넘어간 뒤에도 남은 밀밭에서는
밀알들이 자랐다
햇빛 쟁쟁한 한낮에 해 조각을 베어 물고
둘레 공기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밀알들이 잘 익었다 그리고
그 황금빛 생애는 사라졌다
땅을 떠난 밀알들이 줄을 서서 방앗간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방앗간에 내걸린
부서진 살 거울에 '너'는 보이지 않고
'나'는 없어졌다
이 거울로 집을 지은 빵집에서는 누구라도
밀가루 한 줌으로 사랑을 굽고
밀가루 한 줌으로 기쁨을 부풀린다
는 소문이 빵집 밖으로 새어나왔으나
세상의 밥상머리에서의 비만,
비만이 감춘 허기가 소동하는,
빵집 앞은 배고픔으로 붐볐다
애찬의 식탁에서
밀알들이 삼킨 해 조각들 둥글게 모였다
밀떡에서 뜨는 해 한 덩이! 눈부시다
햇살 끝에 매달린 눈물방울,
그 처연한 슬픔까지도
0時에서 0時 사이
ㅡ겨울 정류장에는
김길나
영하의 겨울이다. 사람들이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어디론가 거듭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로
늘 붐비는 길에 서서 망연히 길을 응시한다.
응시하는 두 눈 밑으로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게 있다.
말할 때마다 언어에 서려 퍼져 흐르는 게 있다
사람 안에서 스며나와 김발로 증발하는 저것,
하얀 숨결, 혹은 하얀 입김
살이 허물어 氣化하는 그 마지막 구름깃발이
코에, 입에 미리 꽂혀 펄펄 날리다
사라지곤 하는,
그러나 저 숨결에 배어나오는 김발은 또
살아 있는 그대 몸속에서 가만가만 출렁이는
따순 기운 한 자락이거나
불안과 고독까지도 모락모락 묻어나오는
그대 눈물의 승천일 터인데
그대 날숨이 내 들숨으로 스며 들어오는
우리 서로 숨을 섞고 사는 지상의 겨울 길에서
여린 입김들 하얗게 김발로 스러지며 남기는 말,
그 말 채 엿듣기도 전에 내 곁에 사람들 어느새
떠나가고 없다. 이제, 그 겨울 정류장엔
나도 없다
시인의 말
어느 날의
낮달과 까치와 내 눈길과의 즐거운 만남
그러나 그 찰나의 우연은 이미 사라졌다
까치가 날아가고 없는 곳에서
달에 포개져 있는 까치
기쁜, 그리고 슬픈 반추
2003년 봄
김길나
시집 《둥근 밀떡에서 뜨는 해》, 문학과지성 시인선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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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나 시인이 2022년 9월 8일 영면에 드셨습니다.
생전의 그 치열한 예술혼을 우리는 오래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김길나 베로니카님이
주님 안에서 안식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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