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잡히지만 말고
돈 가방을 들고 튀는 여자,아주 어릴 때부터 온갖 못된 소
시지와바나나와하이힐과잭나이프에 짓밟히고, 쫓기고, 유
린당하고, 모욕당한 여자, 영화 속이지만 제발 잡히지 말고,
무사히 돈가방을 들고 캄캄한 마천루, 그 한 가닥 빛 속으
로 도망쳐 평생 쓰고도 남을 눈먼돈, 깨끗이 세탁된 돈, 숨
기기만 하면 아무도 찾아낼 수 없고 추적이 불가능한 돈, 누
구의 돈도 아닌 돈, 아무리 쓰고 또 써도 세금이 안 붙는 돈,
환상의 돈, 제발 잡히지만 말고 원 없이 그 돈 뿌리며 살기
를, 그 돈으로 표적 가능한 문신도 지우고, 얼굴도 바꾸고,
비열하고 악독한 자본주의, 그 단말마의 문명이 온몸에 새
겨놓은 지독한 상처도 깡그리 지워버리고, 뱃속의 아이와
그 아이를 바라보는 간절한 엄마의 마음으로, 제발 잡히지
만 말고 무사히, 영화 속이지만 온갖 개새끼소새끼잡새끼들
은 모두 떨쳐버리고, 아무리 격한 폭풍 속이라도 우아하고
세련되게, 아무런 가책도 죄의식도 없이, 돈 가방만 끌어안
고 앞으로, 앞으로, 제발 잡히지만 말고, 무릉도원으로, 천
국으로, 평범 속으로, 인간답게여자답게엄마답게, 네 천성
대로 오래오래 행복하게자유롭게, 제발 잡히지만 말고, 제
발 잡히지만 말고 ......
녹(綠)의 미학
녹은 쓸쓸함의 색깔
염분 섞인 바람처럼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세상을 또박또박 걷던 내 발자국 소리가
어느 날 삐거덕 기우뚱해진 것도 녹 때문이다
내 몸과 마음에 슨 쓸쓸함이
자꾸만 커지는 그 쓸쓸함이
나를 조금씩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건물에 스며드는 비처럼
아무리 굳센 내면으로도 감출 수 없는 나이처럼
녹은 쓸쓸함의 색깔
흐르는 시간의 사랑 제때 받지 못해
창백하게 굳어버린 공기
김상미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 문학동네시인선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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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을 "쓸쓸함의 색깔"로 여긴다. 여기서 "쓸쓸함"은 소진되고 "감출 수 없는 나이처럼" 늙어가는 자아의 표정일 수도 있다. 이것은 자기 안에도 있고 바깥에도 있다. 내부와 외부를 관류한다. 사회적 관계에 스며들어 "모든 것을 갉아먹는" 현상으로 보아도 되겠다. 세상을 향하여 "또박또박 걷던" 자아를 기울게 만들고 "흐르는 시간의 사랑 제때 받지 못해/창백하게 굳어버린 공기"처럼 관계가 경화되며 "쓸쓸함" 이 안팍을 지배하는 정조가 된다. 이러한 "녹"은 이중성을 지닌다. 그 하나는 자연스러운 소멸이고,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모든 단단한 것을 녹이면서 폭력적인 질서로 가는 과정이다. 물론 시인의 관심은 전자에 있다. 이러한 무위의 "쓸쓸함"은 저항의 대상이 아니라 조금 비약한다면 자연으로 가는 궁극적인 기쁨의 지점이다. 그래서 그것은 "녹의 미학"으로 격상하며 「다중 자화상」이 말하는 "소금 기둥 속 설탕 그릇"으로 표현되는 역설로 나아간다. (발췌)
- 해설 「무위의 기쁨, 시인의 삶」, 구모룡(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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