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그 집/박수현

Beyond 정채원 2023. 3. 14. 20:49

그 집

 

박수현

 

그 집은 사철 겨울이었네 영지못을 메운 터에 자리한 국민주택 13호, 담쟁이넝쿨이 온몸을 뒤채며 벽마다 기어올랐다네 삐걱, 철대문을 밀었을 때 사월에도 꽃망울 틔우지 못한 목련 한 그루가 아는 체를 했네 테너가수 N선생과 치매든 모친, 집안일 하는 아주머니, 영 철들지 않을 표정의 딸이 사는 집에 나는 길고양이처럼 잠행 했다네 갓 스물, 입주 과외하던 내가 그 애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그 집은 더 어려운 문제를 내게 내주곤 했다네 그 앤 자주 가출했고, 할머니가 종일 단물을 빨다 뱉은 쥬시후레쉬민트 은박지로 새를 접어 날렸다네 그 애가 접었던 종이새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였을까 저들끼리 모가지를 감고 조르며 오르는 담쟁이넝쿨들의 밀어(密語)였을까 달빛이 푸른 속눈썹을 늘이는 추운 밤이면 기울어진 가구 틈 어디선가 그 소리는 더 또렷이 새어 나왔다네 그런 밤이면 내 청춘의 페이지가 남루하게 시드는 담쟁이넝쿨 아래 나는 더 어두워져 가위에 눌렸다네

 

지난밤, 어느 손이 나를 그 집에 이끌었다네 고급 빌라가 들어선 거기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N선생과 반쯤 닳은 놋숟가락 같은 얼굴로 껌을 씹어대는 할머니와 볕뉘 같은 눈을 한 그 애를 스쳐 보았네 더 멀리 도망칠수록 나는 깨진 등피(鐙皮) 같은 그 집에서 더 어둡게 저물고 있었네

 

- 《문파》 2022년 겨울호

- 《문학바탕》 2023년 봄호/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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