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화
박수현
인감 떼러 가서 알았다 엄지는 물론 나머지 손가락을 다 갖다 대도 주민센터 지문인식기는 나를 읽어내지 못했다 일종의 피부주름인 지문은 유사 이래 가장 신뢰받는 신분 확인 수단이라는데 나는 나를 증명하는 데 거듭 실패하고 있었다 돌기궁상문으로 분류된다는 그 주름을 나는 대체 언제 도난당했을까
세상은 차라리 주름의 촘촘하고 슬픈 서사라 할 터? 뫼비우스의 띠처럼 처음도 끝도 없는 주름 방정식의 이합집산에 따라 거시기 뭐시기로 분류된다는 유언(流言) 같은 비어(蜚語)도 있으니 말이다
산맥의 능선이나 계곡은 땅의 주름이며, 사막의 사구(沙丘)는 바람의 주름이며, 해안의 파도는 물의 주름이 아니겠는가 따지고 보면 아코디언, 오르간 같은 악기가 주름의 처삼촌쯤 된다면, 미닫이 창문이나 계단 따위는 주름의 사돈 팔촌쯤 된다 하겠다 어쩌면 하늬바람이나 빛 광자 광풍(光風)은 어여쁘게 주름진 바람의 맑은 아미일 거다 하긴 호모사피엔스인 우리는 삶의 행려(行旅)에서 고사목 껍질처럼 딴딴한 주름을 등고선처럼 가슴에 새기며 어느 해변 기슭에서 쓸쓸히 좌초되기 마련일 것이다
몸속에서 몸 밖에서 무럭무럭 자란 주름들을
접거나 구기거나 촘촘히 묶었다가 다시 펼쳐 놓는다
다랭이논처럼 이어지며 흘러내리는 주름 사이로
물새 떼가 날아간다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간다
빛과 어둠의 주름이 서로 몸 바꾸며 나부끼다가
우리를 장의차 검은 리본 앞에 부려놓는다
주민센터 지문인식기가 끝내
나를 읽지 못한들
금강석보다 굳고 침향(沈香)보다 짙은
결승(結繩) 문자 같은 것들이
곧, 당신과 나를 포박하러 올 것이다
《문학청춘 》 2023년 봄호|, 집중특집
'밤의 네 번째 서랍'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영장/심언주 (0) | 2023.04.10 |
---|---|
도시가스/이수명 (0) | 2023.04.08 |
서울남부구치소/정혜영 (0) | 2023.04.01 |
그 집/박수현 (0) | 2023.03.14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19/정숙자 (2) | 2023.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