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히거나 부서지거나
정채원
우리는 그곳에 가야한다
칼날 같은 파도를 헤치고
난파선을 타고라도 가야한다
배가 부르고 포만감에 졸음이 쏟아져도
이곳에 계속 머무를 순 없다
매 순간 떠나야한다
먼저 도착한 일당이 원주민처럼
텃세를 부리며
천길 벼랑으로 등을 떠밀지 모르지만
그곳에 원주민은 없다
이미 부러진 목이 다시 부러지고
무덤 속에 있던 반쯤 부패한 입술이 깨어나
푸른 립스틱을 바를지라도
우리는 기필코 그곳에 가야한다
그곳은 도착하자마자 이곳이 되고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다만 가야할 이유만 있다
덧칠된 세계
정채원
고흐의 암울한 콧구멍이
여인의 젖가슴에 유두처럼 찍혀 있다
엑스레이를 비추면
파이프를 문 자화상* 아래
여인의 누드 반신상이 밑그림으로 앉아 있다
햇살 비쳐드는 방안에서 웃옷을 벗던 여인
이마 위로 흘러내린 숱 많은 머리칼과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머금던
분홍빛 볼은 검게 덧칠되고
자화상의 밑그림은 어쩌면 아흔아홉
떠나가라, 떠나가라, 떠나가지 마라
얼굴이 얼굴을 압정처럼 누르고 있는
덧칠된 시간이 다시 눈을 뜬다
감겨도 감겨도
사후까지 깜빡이는 눈동자처럼
가슴 맨 밑바닥에서
지워진 얼굴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얼굴이다
어서 이 낡은 세계를 뒤집어다오
2백 년 묵은 불 꺼진 파이프를
여인의 누드가 깔고 앉는다
― 점화!
* 반 고흐의 그림
《서정시학》 2023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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