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책소식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한이나 시선집

Beyond 정채원 2024. 4. 14. 16:56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삼십 년 된 목백합 한 그루가 창을 가린다

 

   내가 오두마니 앉아있는 그늘의 집에 그가 낮에도 불을 켜

라고 성화다  그는 조금의 어둠도 참지 못하고 불을 켜는 사

람, 나에겐 불 밝혀 어둠을 몰아내는 그가 있다 그늘에 상주

하는 내가 있다

 

   나는 녹색의 장원에 꽁꽁 숨어 등뼈가 굽었다 푸른 그늘로

뒤덮여  조금은 어둡고 침울한 집, 환한 햇살에  칸칸이 슬픔

을 알몸으로 내보이지 않아서 좋다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불운도 시샘 안 하고 비껴갈 푸른 잎사귀 그늘의 집, 행여

뼛속 저 깊은 곳 또아리 튼 슬픔이 도질까

 

   세상과 대적하지 않고 창밖 숲속  쪽문을 가만히 연다 내

안의 다른 길,  비밀의 정원 행간을 풀어 읽는다

 

   나에겐 어둠을 내쫓는 그가 있고 그늘을 찾아 앉는 내가

있다

 

 

 

한이나 시선집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서정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