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삼십 년 된 목백합 한 그루가 창을 가린다
내가 오두마니 앉아있는 그늘의 집에 그가 낮에도 불을 켜
라고 성화다 그는 조금의 어둠도 참지 못하고 불을 켜는 사
람, 나에겐 불 밝혀 어둠을 몰아내는 그가 있다 그늘에 상주
하는 내가 있다
나는 녹색의 장원에 꽁꽁 숨어 등뼈가 굽었다 푸른 그늘로
뒤덮여 조금은 어둡고 침울한 집, 환한 햇살에 칸칸이 슬픔
을 알몸으로 내보이지 않아서 좋다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불운도 시샘 안 하고 비껴갈 푸른 잎사귀 그늘의 집, 행여
뼛속 저 깊은 곳 또아리 튼 슬픔이 도질까
세상과 대적하지 않고 창밖 숲속 쪽문을 가만히 연다 내
안의 다른 길, 비밀의 정원 행간을 풀어 읽는다
나에겐 어둠을 내쫓는 그가 있고 그늘을 찾아 앉는 내가
있다
한이나 시선집 《알맞은 그늘이 내가 될 때》, 서정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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