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랙탈
안희연
1
아이들은 숲으로 간다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새는 까맣게 잊고
여기가 어디지 어디였지
새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다
2
아이들은 들여다보고 있다
왜 저 사람은 물속에서 잠을 자고 있지?
아이들은 긴 나뭇가지를 주워 와
물에 젖은 구두를 건진다
이 구두가 우리를 데려다 줄지 몰라
호주머니 속에서 새들은 힘차게 파닥거리고
아이들은 종종걸음으로 구두를 따라간다
3
아이들이 침입한 숲은
모처럼의 소동이 귀찮다
눈앞에 없는 새만이 진짜일 거라고 믿는 것
여름은 독 오른 실뱀을 풀어놓고
눈에 안 보이는 여름이 있을 리 없다고 말한다
여자는 긴 하품과 함께 책장을 덮는다
아이들은 영원히 잠든다
숲이 다시 열릴 때까지
4
이 별은 나의 불행을 축으로 운행되고 있어
스크린에서 한창 영화가 상영 중이다
식탁에 앉아 혼잣말을 하던 주인공은
입속으로 수저를 밀어 넣다 말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녀는 오늘 낮에 읽은 점자책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새를 찾아 숲으로 간 아이들이 이미 새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
눈먼 자가 딱 한 번 눈을 뜰 때 영화는 총성과 함께 끝이 난다
5
꽤 괜찮은 불행이었어
관객들은 만족한 듯 극장을 나서고 같은 시간
남자는 불속에 앉아
불행을 관람하던 관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는 문장을 적는다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서둘러 그 문장을 지운다
꼭 한 방울의 기억이 공중에서 하얗게 부서진다
6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어
그가 노트 위에
종말이라 적고 그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 것 같은
7
백지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는 화들짝 놀란다
불현듯 그의 호주머니 속에서 새 한 마리가 만져졌기 때문이다
—《문학과사회》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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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 1986년 경기 성남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2012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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