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스크랩] 프랙탈/ 안희연

Beyond 정채원 2014. 10. 5. 12:36

프랙탈

 

   안희연

 

 

 

      1

 

아이들은 숲으로 간다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새는 까맣게 잊고

여기가 어디지 어디였지

새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다

 

 

      2

 

아이들은 들여다보고 있다

왜 저 사람은 물속에서 잠을 자고 있지?

아이들은 긴 나뭇가지를 주워 와

물에 젖은 구두를 건진다

이 구두가 우리를 데려다 줄지 몰라

호주머니 속에서 새들은 힘차게 파닥거리고

아이들은 종종걸음으로 구두를 따라간다

 

 

      3

 

아이들이 침입한 숲은

모처럼의 소동이 귀찮다

눈앞에 없는 새만이 진짜일 거라고 믿는 것

여름은 독 오른 실뱀을 풀어놓고

눈에 안 보이는 여름이 있을 리 없다고 말한다

여자는 긴 하품과 함께 책장을 덮는다

아이들은 영원히 잠든다

숲이 다시 열릴 때까지

 

 

      4

 

이 별은 나의 불행을 축으로 운행되고 있어

스크린에서 한창 영화가 상영 중이다

식탁에 앉아 혼잣말을 하던 주인공은

입속으로 수저를 밀어 넣다 말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녀는 오늘 낮에 읽은 점자책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새를 찾아 숲으로 간 아이들이 이미 새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

눈먼 자가 딱 한 번 눈을 뜰 때 영화는 총성과 함께 끝이 난다

 

 

      5

 

꽤 괜찮은 불행이었어

관객들은 만족한 듯 극장을 나서고 같은 시간

남자는 불속에 앉아

불행을 관람하던 관객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는 문장을 적는다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서둘러 그 문장을 지운다

꼭 한 방울의 기억이 공중에서 하얗게 부서진다

 

 

      6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어

그가 노트 위에

종말이라 적고 그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 것 같은

 

 

      7

 

백지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는 화들짝 놀란다

불현듯 그의 호주머니 속에서 새 한 마리가 만져졌기 때문이다

 

 

 

                       —《문학과사회》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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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연 / 1986년 경기 성남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재학. 2012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출처 : 푸른 시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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