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그 여름의 끝/이성복

Beyond 정채원 2024. 9. 1. 16:12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 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시집 그 여름의 끝(1990)

 

 

 

 

 

木백일홍

 

정채원

 

 

여름이 깊어야 비로소 피던 꽃

다른 꽃 다 폈다 져도

백일 동안 지지 않고 버티던 꽃잎들

아무리 못 본 척해도 고집스레 붉던 꽃잎들

연못 가득 떨어져 있다

그래, 잘 가라

외나무다리 건너

나도 언젠가 너 따라가리니

가서, 나도 백일 동안 지지 않고 붉을 것이니

너를 향해 한결같이 피어 있을 것이니

그때 너, 나를 모른다 모른다 하라

첫서리 내릴 때까지

내가 너에게 그랬듯이

 

 

 

제2시집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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