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무늬 액자가 있는 방
강성남
20여 년 나와 함께한 물방울무늬 액자가 있는 방*
이사하는 날 담장 밖에 내다놓았다
마음이 아려 잠이 오지 않았다
소나기 내린 다음날, 밤새 젖었을 텐데
얼룩은커녕 한층 투명한 얼굴이다
물방울 속 이야기 고스란히 간직한 채 일광을 즐긴다
물방울 속 어떤 얼굴은 가시처럼 보이고
어떤 놈은 공작새의 날개, 다이아몬드, 조약돌, 화살표
때로는 행진하는 군인처럼, 매미 떼로
또 어떤 날은 꽃밭으로 읽혔다
골목을 몰아가는 물의 도화선으로 보이다가
내 피를 몰아가는 피톨처럼 읽히다가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방울을 거울삼아 들여다볼 때가 많았다
밝은 곳에서 보니 물방울이 매단 이야기들
내 영혼을 담은 자화상이 아닌가
햇살과 구름, 건너편 창문과 지붕들
지중해 바다를 품고 출렁인다
이 그림을 위해 화가는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을까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수하며 자기만의 색깔을 찾으려 했을까
그도 난간에 매달린 채 운 적 많았을 것이다
소중한 줄 모르고 버리려 했던 물방울무늬 액자가 있는 방
그가 있어 내 미래가 밝음을 깨닫는다
*김창열 화백
시집 《당신과 듣는 와인춤》, 현대시세계 시인선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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