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령 난 피아노
송찬호
망령 난 피아노였다
말 등 위에
지붕 꼭대기에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음계가 맞지 않아
건반을 짚으면
아무 소리나 질러댔다
모든 조율을 거부했다
퉁퉁 부은 고딕식 다리에
신경통 약을 먹고
빚에 시달리면서도
구석의 어둠과 먼지를 거느린
모서리왕으로 거들먹거렸다
<옛날 어떤 사건이 피아노의
운명을 망친 게 사실일까
검은 건반과 흰 건반의 음계를 밟으며
들꽃을 꺾어든 어린 신이
정말 피아노 옆을 지나갔을까>
바람이 종일 밀을 빻고
국경에 나갔던 해바라기들도
총을 내려놓고 쉬는 저녁 무렵
그 망령 난 피아노는 눈을 감았다
말 등 위에
지붕 꼭대기에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음악의 장례가 으레 그렇듯,
창으로 피아노를 찔러 떨어뜨렸다
『시와반시』 2016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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