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π
정숙자
0℃는 미풍에 섞인다. 먼 데서 일어선 그 바람은 살얼음을 품는다. 수면의 가장자리부터 건드린다. 한 겹, 한 겹씩 발목 잡히는 물결. 중심까지 굳히는 데는 한 계절을 몽땅 걸어야 한다.
지나온 봄여름을, 여름가을을 다 게워야 하지. 겨울도 초입에서는 아니 얼고 한복판에 가서야 꽝꽝 얼 수 있음을… 얼었음을 증명하지. 그래야만 비로소
철새를 부를 수도
구름들을 헹굴 일도
햇살 튕겨 낼 물별*도 없지
그러나 그때 호수는
찢어진 환상
삼라만상을 떠나
오롯이 견고가 되어보는 것이다
물이었던 기의를, 물결이었던 기표를, 호수였던 둘레를 그 모두를 응집한 거울, 겨울을
쨍그랑 ---
깨뜨려 버려- - - - - -
들녘 가득히 유리 파편이 깔리고, 언덕 촘촘히 유리 파편이 스며들고, 깃털들 다시 살아나고… 비척대고… 저 아래 지느러미로 울부짖으며
길섶에 문득 솟은 초록들, 새로이 눈뜬 그 부리들을 일일이 어루만지며, 윽 소리 저절로 끓는 살풍경 매번 되풀이로 겪는 호수는 끝없이, 끝없이,
*물별: 물결이 햇빛을 반사할 때 생기는 섬광(필자의 신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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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신작시 「얼음 π 」에는 π(원주율)를 비롯하여 말줄임표와 줄표, 점선, 신조어, 쉼표마저도 의도적인 시적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
(…)
과연 시인은 왜 이처럼 많은 기호들을 시의 언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언어만으로는 가능하지 못하는 사유를 시인 스스로 시적 언어의 한계로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로만 야콥슨이 스쳐간다. 로만 야콥슨은 '무엇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하는 것은 '언어'라는 '기호'의 재현 문제로 보았다. 어떤 것을 '선택'하고 '결합'한다는 것은 어떤 것의 약점과 강점을 고려해 최적화하려는 의지이다. 궁극적으로 언어가 지닌 기호적 코드의 '선택'과 '결합'의 차이로, 발신자가 보내는 메시지는 최적화되어 수신자에게 도달한다. 하나의 기호는 기호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지만,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를 맺으며 의미를 부여받으므로 '선택'과 '결합'은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구조화된다. (발췌)
전해수(문학평론가)
시사사 포커스(2019년 3-4월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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