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제4시집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탈근대 시뮬라크르의 쓸쓸한 풍경들/오민석

Beyond 정채원 2019. 11. 29. 12:49



탈근대 시뮬라크르의 쓸쓸한 풍경들

―정채원 시집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읽기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교수)



I.

정채원은 문학이 세계의 ‘복제’가 아니라 ‘생산’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시에서 세계는 날것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정채원의 시에서 세계는 문학의 장치(들)에 의해 굴절되므로, 독자들이 그의 시에서 일차적으로 만나는 것은 텍스트 혹은 언어 자체이지 현실이 아니다. 정채원은 세계를 그대로 베끼지 않고 한 번 꺾음으로써 언어를 전경화(前景化)하고 세계를 후경화(後景化)한다. 이렇게 세계를 재구성할 때, 은유, 판타지, 비약, 역설, 배리(背理)의 언어가 동원된다. 프로이트가 꿈을 해석할 때 (꿈의) 위장의 장치들을 거꾸로 풀어가는 것처럼, 정채원의 시를 해석할 때 우리는 세계의 재구성에 동원된 그의 굴절의 언어들을 거꾸로 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정채원의 시를 읽는 재미이고 기쁨이다. 그의 언어는 말하자면 세계의 재변주(再變奏)인데, 그것을 통해 거꾸로 세계를 들여다보려면 불가피하게도 (현실이 아닌) 텍스트, 우리가 시 자체 혹은 ‘시의 몸’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그의 언어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창이 아니라, 굴절의 다양한 색채를 동원한 만화경이다.


붉은 옷을 입고 누워 있다

복숭아나무 아래

  

나 어릴 때 당사주를 보신 엄마는

누워 있는 나를 보고 섬뜩하셨다지

그림 속에 누우면 죽는다 했는데

일찍 죽는다 했는데


…(중략)…

칼은 복숭아나무 가지를 자르고

나를 스쳐지나가고

비 오듯 쏟아지는 꽃잎 아래


누군가 복숭아나무 곁을 지나며 말하지

잎새가 웅얼거린다고

가지가 자꾸 앓는다고

이따금 노래 소리로 들린다고

천 년 전 강가에서 들었던 그 비파 소리라고


…(중략)…


나는 오늘도 바래진 붉은 옷을 입고

신음하며 누워 있다

해마다 천도가 주렁주렁 익어가는 나무 아래


―「제8병동―복숭아나무 아래」 부분


“제8병동”, “붉은 옷”, “당사주”, “천도” 등의 기호는 마치 모자이크처럼 ‘일상’을 재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 시는 마지막까지 현실의 풍경을 속 시원히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천도가 주렁주렁 익어가는 나무”라는 풍요로운 낙원 이미지와, “병동” 혹은 그 나무 아래에서 “신음하며 누워 있”는 어떤 환자의 모습이 대조되고 있을 뿐이다. (궁금하기 짝이 없는) 현실의 나머지 디테일은 모두 독자의 상상력에 맡겨진다. 그러나 죽음과 그 반대편의 유토피아 이미지가 선명하게 교차되면서 이 시는 ‘텍스트 자체’의 화려하고도 슬픈 그림을 그려낸다. 그것은 모든 것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계속 할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 같은, 마치 일상성을 뭉개버린 반(半)추상의 그림 같다. 그것은 의미를 계속 지연시키면서 지속적으로 의미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의미 자체가 아니라 ‘의미화 과정(meaning in process)’를 지향한다. 이렇게 디테일을 지우면서 더욱 많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그의 시적 문법이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을 때 일상의 구체적이고도 소소한 이야기들을 기대한다면, 이런 기대들은 (그의 대부분의) 시에서 거부당한다. 그는 현실의 직접적 모방이 시가 아니며, 시란 무엇보다도 그것의 ‘미적 가공’ 혹은 굴절이고, 그것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현실을 되비추는 거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II.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의 시에서 읽어내는 현실의 풍경은 (물론 그것들은 구상[具象]이 아니라 비구상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불통, 권태, 우연, 폭력, 악몽, 죽음, 시뮬라크르(simulacra)로 구성된 모자이크이다. 보드리야르(J. Baudrillard)가 실물 지배의 근대적 현실이 사라지고 실물보다 더 실물 같은 시뮬라크르 지배의 탈근대적(postmodern) 현실을 이야기했다면, 들뢰즈(J. Deleuze)는 시뮬라르크를 실물 혹은 본질이라는 “선험적인 동질성”과 아무런 “내적 유사성”이 없는 “차이”들의 체계로 설명한다. 정채원의 세계를 구성하는, ‘실체’가 없는 것들, 시뮬라크르들은 이런 점에서 보드리야르보다는 들뢰즈의 그것에 훨씬 더 가깝다. 정채원은 어떤 사라진 ‘실재(Reality)’를 가정하고 가짜들에 의해 숨겨진 그것을 찾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세계에 어떤 고정된 ‘실재’ 자체가 부재하며, 세계가 오로지 차이의 기호(sign)들인 시뮬라크르의 무한한 연쇄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리고 그 기호들은 (실체가 없으므로) 서로 불통하고, 무의미하며, 수많은 우연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엘리엇(T. S. Eliot)이 근대의 “황폐함”을 노래했다면, 정채원은 탈근대의 (탈중심화된 차이들로 구성된 세계의) 쓸쓸한 풍경을 그려낸다.

 

오늘도 택배 기사는 벨을 누른다

아무도 문을 열지 않는다

말없이 상자를 두고 떠난다

상자가 바뀌거나 주인이 죽거나


상자가 죽거나 주인이 바뀌거나

오늘의 배달은 무사히 끝났다

―「배달 사고」 부분


인용된 첫 연의 마지막 문장과 둘째 연의 첫 번째 문장은 주어(주체)의 변환이나 술어의 변환이 아무런 변화를 초래하지 않는 현실을 보여준다. “상자가 바뀌거나 주인이 죽거나// 상자가 죽거나 주인이 바뀌거나”, 이랬거나 어쨌거나 아무런 상관이 없는 현실은 “아무도 문을 열지 않는” 관계 때문에 발생한다.


뼈 없는 닭발 같은 날들이

나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동안


무럭무럭 자라난 꽃대

내 심장을 뚫고

불쑥 솟아난

팔다리, 내 것이 아닌

내 것이 아닌 것도 아닌


허우적거리는 붉은 혀

펄럭이는 침묵들 사이


―「슬픈 숙주」 부분


실체가 없는 현실(“뼈 없는 닭발 같은 날들”)은 “내 심장”에서 나온 신체의 기관들조차 “내 것이 아닌” 혹은 “내 것이 아닌 것도 아닌”, 말하자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이 허깨비들의 세상, “숙주”를 슬프게 만드는 세상은 주체와 주체, 주체와 그것의 기관들 사이에 아무런 소통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오로지 “펄럭이는 침묵들”만이 있을 뿐이다.


달려와 헐떡이며 나를 포옹할 때

너는 실재처럼 느껴져

아니, 돌아서 입술을 실룩이며 욕을 내뱉을 때

더 실재처럼 보여


―「홀로그램」 부분


나는 지루해. 하품을 멈출 수 없어. 나만 보면 하품까지 따라 하는 사람들, 허공처럼 지루해. 매일 먹은 미트볼도 지루해. 다음 미트볼 요리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에 사는 로봇에게 맡겨야겠어. 때로는 당신 같고 때로는 나 같은 그들, 늘 지루한 그들, 바보 같은 그들, 서로 너무 닮아 가짜가 진짜이고 진짜가 가짜인 그들에게 말이지.


―「지루한 미트볼」 부분


첫 번째 시는, 에로스가 아니라 타나토스의 제스처를 취할 때 오히려 더 “실재”처럼 보이는 시뮬라크르 지배의 현실을 보여준다. 두 번째 시는 한 편으로는 로봇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미 시뮬라크르가 되어버린 탈근대적 주체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로봇에 선행하는 동질성을 이미 상실한 정도로 시뮬라크르화된 탈근대의 주체들은 “서로 너무 닮아 가짜가 진짜이고 진짜가 가짜인” 로봇과 이미 하등 다를 바 없다. 인간이 로봇의 선험적 동질성이 아니라, 이미 그것조차 상실한 시뮬라크르가 되어 있을 때, 남는 것은 ‘지루함’, ‘권태’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채원 시인이 읽어낸 탈근대 문화의 한 징후이다. 소설가 이상의 「날개」가 읽어낸 근대의 권태는 이렇게 탈근대의 “불쾌한 골짜기”에 이미 들어가 있다.


III.

“가짜를 먹고도 불끈불끈하는 가짜들/ 죽어도 죽지 않는 그들이 오리지널 진품”(「튜링 테스트(Turing test)」)인 세계를 지배하는 콘텐츠는 폭력과 우연성이다. 폭력은 권태를 극복하는 수단이 되고, 가짜가 진품인 세계에 일관된 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우연의 개입에 의해 세계는 예측 불가능한 ‘악몽’의 대상이 된다.


부드러운 혀로 도려낸 심장들이

담장에 매달려 너덜거리는 6월


갓 피어난 연인들은 뺨을 비비며

서로의 가시를 핥고


밤새 바람을 가르던 칼날 위로

변심한 장미가 빼곡하게 피어났다

어느새 칼날을 다 삼켜버린

핏빛 장미가 무더기로 피어났다


―「장미 축제」 부분


읽는 이에 따라 길항(拮抗)의 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 시는 그러나 탈근대의 풍경으로 전치(轉置)되어 있다. 담장에 핀 아름다운 장미들을 “도려낸 심장들이” “매달려 너덜거”리는 모습으로 그린 대목과 “칼날을 다 삼켜버린/ 핏빛 장미”와 같은 구절은, 이제는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자체로 설명할 수 없는, 상징계의 끝에서 파열하는 탈근대적 미의식의 표현이다. 시뮤라크르 지배의 탈근대는 이런 점에서 아름다움의 기표 안에도 ‘악몽’을 심을 수밖에 없는 “가시”들로 가득 차 있다. 인간과 세계를 지배하는 일관된 원리도 사라지고, 그림자의 원본도 사라진 세계에서 예측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기표들은 끝없이 분열되어 있으므로 먼 과거의 안정된 의미를 갖지 못한다.


꼭 내려야 하는 정거장을 그냥 지나쳐

낯선 환승역까지 가버린 밤처럼

바람은 예측할 수 없지


…(중략)…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하여

쉬지 않고 떠나고 있어, 바람에 업힌 시간도


―「바람을 알아보는 안목」 부분

탈근대 시대에 “꼭 내려야 하는 정거장”과 같은 필연성의 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한 의미소를 따라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하여/ 쉬지 않고 떠”나는, ‘우연성’에 모든 것을 내맡긴, 길 잃은 기차의 시대이다. “잘 다녀올게요/ 웃으며 떠난 아이 대신/ 영원히 마르지 않을 여행가방만 육백 일 지나 귀가”(「귀가」)하는 세계처럼, 필연성보다 우연성의 지배가 훨씬 더 두드러지는 세계가 시뮬라크르의 탈근대 시대이다.

정채원 시인은 이런 논제들을 정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탈근대 시뮬라크르의 쓸쓸한 풍경을 능청스럽게 그려낸다. 그러니 그의 시에 일상이 없다는 이야기는 다시 번복되어야 한다. 탈근대 시뮬라크르의 일상은 가짜가 진짜 같고, 진짜가 가짜 같으며, 있는 것이 없는 것 같고, 없는 것이 있는 것 같은 풍경이기 때문이다.


『포엠포엠 2019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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