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머무는 시] 미발표작 - 정채원
• 천지일보 (newscj@newscj.com)
• 승인 2019.12.27 09:04
미발표작
정채원
다시 오면 너를 여기서 데리고 나갈게
약속하고 오지 않는 사내를 기다리는 창녀처럼
폴더 속에 갇혀
하루
한 달
한 해 ……
마지막 문장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평]
시는 영감(靈感)으로 온다고 흔히 말한다. 이것은 너무나 뻔한 명제이지만, 때때로 우리는 시가 영감으로 온다는 것을 잊을 때가 더러 있다. 영감이 없는 예술이란 생각할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영감은 우리를 또 다른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 그 세계로 이끄는 힘은 다름 아닌 불현듯 우리를 엄습하는 ‘영감(靈感)’, 그로 인한 것이리라.
그래서 이 영감에 의하여 만난 세계를, 시인의 노고에 의하여 그 세계가 새로운 나름의 하나의 체계를 갖추고 새로운 생명체로 구성이 될 때, 비로소 언어예술이라는 시가 탄생을 한다. 그러나 그 새로운 탄생의 결말지을 마지막 문구가, 마지막 가장 적절한 문구가 떠오르지 않아 시를 완결 짓지 못하는 경우 또한 왕왕 있다. 그래서 시인은 그 마지막 완결의 대미를 이룰 문구를 기다린다. 마치 ‘다시 오면 너를 여기서 데리고 나갈게’ 라고 약속을 하고는 오지 않는, 그 사내를 기다리는 창녀처럼. 절박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그 마지막 결구를 기다리고 기다린다.
그러나 절박하게 기다리는 것이 어디 마지막 시 구절뿐이겠는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 우리네 삶에 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올 듯, 올 듯하면서, 오지 않는 것, 그것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우리들 삶의 또 다른 모습 아니겠는가. 마치 폴더 속에 갇혀서 그 폴더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고자, 그 결말을 기다리며 사는 것. 그래서 미발표작으로 남아 기다리며 사는 것, 이것이 어쩌면 우리네 인생인지도 모른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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