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볼레로
―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서평
이숭원(李崇源, 문학평론가)
하나의 시작품과 시집은 별과 별자리, 또는 별과 천공(天空)의 관계와 같다. 하늘의 별이 혼자 있을 때는 단순한 별일 뿐 독자적인 의미를 크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 여러 개의 별이 얽혀 별자리를 이루면 각각의 개별적인 별은 개체의 의미를 넘어서서 더 크고 넓은 의미를 확보한다. 시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작품으로 단독으로 있을 때는 감지되지 않던 의미가 시집의 배열 속에 수용되면 새로운 의미가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김소월의 「왕십리」나 「초혼」도 시집의 문맥 속에서 읽을 때 확장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정채원의 시집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문학동네, 2019. 8)을 읽으면서도 그러한 생각을 했다. 개별 작품에서는 발견되지 않던 의미가 시집의 연속된 맥락 속에서 새롭게 다가오는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개별 작품의 발표도 중요하지만 시집 간행이 중요하고 또 시집의 작품 배열도 상당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헝가리의 비평가 루카치(György Lukács)는 ?소설의 이론?(1916) 첫 머리를 “우리가 갈 수 있고 가야 하는 길에 대해 하늘의 별이 지도의 역할을 하는 시대, 별빛이 갈 길을 환히 밝혀 주는 시대는 복되도다.”라는 말로 열었다. 세속과 신성이 분리되지 않아서 인간이 신성한 존재에게 기도를 하면 길을 찾을 수 있었던 서사시의 시대에 동경이 표현된 대목이다. 여기서 별은 인간에게 갈 길을 알려주는 신성한 세계의 상징이다.
하늘에 많은 별이 있고 그 별들은 여러 개의 별자리로 묶여 있다. 별을 보고 여러 가지 형상을 떠올려 별자리를 만든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다. 그것은 농경민의 상상이라기보다는 유목민의 상상이다. 초원을 이주하며 가축을 방목하는 유목민들은 밤이 되어도 가축들을 지키기 위해 불을 피우고 시간을 보냈다. 끝없이 펼쳐진 대평원 위에 찬란한 별 떨기가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그 중 눈에 띄게 반짝이는 별 무리를 묶어 형상에 맞는 이름을 붙여 별자리를 만들었다. 고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지역에서 생겨난 별자리가 그리스로 전해지면서 그리스 신화의 중요 인물과 그들의 사물이 하늘의 별자리 이름으로 올라갔다. 유목민들의 천체 상상에서 시작된 별자리는 지중해의 해양적 상상력에 의해 또 한 차례 발전한 것이다.
정채원의 시집에는 별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시의 화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장면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는 천공의 상상력에 관심이 없다. 철저하게 땅의 현실에 집중하고 자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삶의 현장에 전심한다. 오욕칠정이 범벅이 되어 들끓는 변덕스러운 세계 속에서 자아의 위상과 타자의 의미를 탐색한다. 그의 시선은 집중적이고 집요하고 선명하다.
시집 첫머리에 배치된 작품 「끝없는 계단」은 우리가 한번쯤 겪었을 만한 민망한 실추의 경험을 소재로 삼았다. 누군가와 만나 다정하게 인사하고 기분 좋게 헤어진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며 돌아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 때 나도 웃으며 한 발 내딛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쓰러진다. 그는 당황하여 손을 뻗치고 나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구르고 그는 올려다볼 뿐이다. 그는 정지된 인형처럼 반쯤 열린 문을 잡고 있다. 젊잖게 헤어진 후 이런 낙상의 모습을 보였다면 두고두고 부끄러울 것이다. 그도 최선을 다했고 나도 최선을 다했는데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이런 사고가 발생한다. 시야를 넓혀 생각해 보면 이런 사고는 꽤 흔히 발생한다. 세상을 사는 것은 이렇게 계단을 구르며 실추(失墜)의 경험을 반복하는 것이고 나가야 할 문을 열지 못하고 반쯤 몸을 돌린 채 멈추어 서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생은 실추의 반복, 민망함의 반복, 미완의 정지의 반복이 아닐까. 이런 명제를 이 시는 담고 있다.
‘파타 모르가나’는 마녀 모르간이 만들어내는 환영이라는 뜻이다. 유럽 남부 해안 지역에서 사용된 이 말은 아랍 지역에서는 신기루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정채원은 우리의 생을 환영이라고 생각한다. 창조의 신화처럼 “여름에는 내 피로 너를 만들었고/겨울에는 뼛가루로 너를 만들었다”라는 어구는 경이롭고 신선하다. 마녀가 기분에 따라 만들어낸 허상이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계단에서 굴러도 부끄러울 것이 없고 문을 열고 나가지 못해도 미안해하거나 민망해할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지워지는 허상인데 아쉬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묘한 것은 모든 것이 “신기루 속의 신기루”임을 알면서도 “그런 줄 알기에 더 놓지” 못하는 우리의 실존이다. 어쩌면 신기루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신기루일 수 있고 환영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착각일 수 있다. 그러면 계단에서 구른 부끄러움, 문을 열고 나가지 못한 행동의 중지는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실재가 된다. 그것은 더 큰 고통이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생의 엄혹한 굴레를 벗어나기 힘든 것이 우리의 삶이다. 생은 이렇게 모순의 도가니에 우리를 가둬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북극 얼음 바다 위에 떠 있는 마법의 성을 향해” 그것이 환영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구절양장을 건너가는” 것이다. 구절양장은 말 그대로 구절양장이기에 오욕칠정의 도가니다. 삶과 죽음의 온갖 치정이 즐비하게 엮여 있다. 그러면 구절양장 밖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거대한 몸체와 등에 혹이 난 듯한 독특한 모양으로 오대양을 헤엄쳐 다니는 혹등고래는 뛰어난 운동력으로 몸 전체를 수면 위로 솟구치기도 한다. “마치 물 밖에도 세상이 있다는 거”를 확인하려는 듯 솟구치지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살아서 갈 수 없는 곳”이라는 인식이다. 말할 것도 없이 혹등고래는 사람의 환유다. 환영인지 아닌지 모르는 이 세상을 벗어나 어디론가 가고 싶지만 살아서 갈 곳은 이곳밖에 없다는 인식. 다른 세계를 넘보아도 갈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는 인식. 이 답답함이 시인으로 하여금 반복해서 꿈을 꾸게 한다. 꿈조차 꿀 수 없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달려와 자신을 포옹하는 황홀한 꿈을 꾼다. 그 환상은 때로 실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환영의 소멸에서 오는 더 큰 배반감이 밀려든다. 더 큰 환멸을 느낄지라도 환상이 주는 매력은 마약의 최면처럼 우리를 이끈다. 현실은 잔인하고 교활해서 돌을 던지면 오히려 잠잠히 흘러가다가 꽃다발을 안기면 시궁창 냄새를 풍기는 배반의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배반의 반작용이 현실의 더 리얼한 모습이기는 하다. 배반감을 안고 무위와 허망의 일상을 반복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어쩔 수 없이 “머지않아 다시 접힐지라도” 꿈의 환각이 “잠시 영롱하게” 펼쳐지기를 바란다. 그래야 우리가 이 황폐한 삶 속에서 “깨진 거울 속에서도 코를 골며 잠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약의 환각을 끌어와도 감출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죽음은 코를 골며 잠든 우리를 깨워, 깨진 거울이 우리의 운명임을 자각하게 하는, 잔혹한 직시의 시선이다. 그 죽음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 이메일을 보냈을 때 수신자가 그것을 열어보면 수신했다는 표시가 나온다. 그러나 그 수신자가 사망하면 이메일의 수신 확인은 어떻게 되는가. 영원한 미수신으로 사이버 공간에 남아 있을 것이다. 택배로 물건이 우송될 경우 물품이 잘못 배송되기도 한다. 어떤 경우 자신에게 배달된 것인 줄 알고 무의식중에 습관적으로 물품을 열어보기도 한다. 이사한 사무실에 택배가 배달되어 문 앞에 오랫동안 방치된 경우도 보았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우리의 죽음과 삶도 어디로 배달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만하다. 「배달 사고」는 제목은 평범하지만 삶과 죽음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다룬 중요한 작품이다. 죽음의 양상은 천차만별이다. 노쇠의 상태에서 신음하다 가는 사람도 있고, 멀쩡하다가 돌연히 떠나는 사람도 있다. 목숨 가진 존재는 어느 의미에서 죽음을 유예 받은 병자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경우 죽음의 음험함은 우리를 어떤 숙주에 기생하며 생명을 지탱하는 기생 생물로 몰아가기도 한다. 매우 구슬픈 죽음에 대한 명상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가장 가혹한 상상이 담긴 작품은 「피, 피아노」다. 이 시는 기이한 일이 많이 소개되는 중국의 ?징화스바오(京華時報)?에 난 기사에서 착상되었다. 생후 오십 일 된 여자아이 몸속에서 바늘 네 개가 발견되어 수술로 하나를 제거하고 두 번째 수술을 앞두고 있다는 보도다. 생후 오십 일 된 아이에게 바늘이 네 개 발견되었다면 우리 몸속에는 대체 몇 개의 바늘이 있을 수 있는가? 이 시는 이런 끔찍한 상상에서 촉발되었다. “언제 생겨난 건지 모를 바늘들이” 늑골 사이를 지나가고 핏줄 속에 가는 바늘들이 돌며 혈관을 자극한다면 우리의 몸과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참으로 끔찍한 상상이다. 혈관의 자극이 피아노 현을 건드리듯이 소리의 높낮이로 나타난다면 모르지만 통증의 강약으로 나타난다면 우리의 시간 시간은 공포의 연속일 것이다. 당신의 반복되는 통증이 몸속을 도는 바늘에 의한 것이라면 통증의 반복이 처참한 피의 반주가 될 것이라는 상상이다.
삶과 죽음이 이러하기 때문에 죽음은 바늘 하나가 심장 혈관이나 숨 쉬는 기도를 갑자기 막아버리듯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죽음은 비정한 것이다. 「닫히면 그만인 문」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죽음은 닫히면 그만인 문이다. 일찍 닫히는 문이라든가 큰소리로 닫히는 문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삼십대의 누구는 십 년간 부은 적금에 주식 오른 돈을 합하여 은행 융자를 끼고 22평 아파트를 사서 이사하기 전 도배와 도장까지 주문해 놓고 귀가하던 중 고통사고로 죽었다. 생후 십오 일 된 아이는 심장판막증으로 숨이 가쁜데, 구십이 넘은 할머니는 천식도 잘 견디다가 난데없는 메르스로 죽음을 당했다. 삼수 끝에 S대에 합격한 젊은이는 신입생 환영회에서 술을 먹다 기도가 막혀 죽었다. 몸속의 바늘이 우연히 어딘가를 막으면 죽음의 세계로 간다. 우연히 닫힌 그 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는다. 죽음이 비정한 것이 아니라 생이 비정하다. 한 번 닫히면 열리지 않는 죽음의 문이기에 시인은 고도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심장이 멈춘 다음에 펼쳐질 생명감의 미련을 찬란하게 묘사했다. “머리통 속 흑백의 불덩이가/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로지르며/시간의 목에 칼금을 긋는 동안//가슴에 갇혀 퍼덕이는 날개가 있다”라고. 죽음의 순간에도 날아오르려 했던 날개의 이미지를 고이 간직하고 싶다.
여기까지의 진단에 의하면 시인의 사유는 매우 우울하다. 세상은 헛것이요 환영이며, 추락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고, 동문서답의 팬터마임을 반복하며, 바늘이 찌르는 고통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존재다. 평론가 이경수의 진단대로 세상에 대한 고통의 심정을 애도의 형식으로 표현한 시집이라 할 만하다. 우울한 악몽의 연속 속에 위안을 주는 것은 시인의 다채로운 화법이다. 그는 하나의 사실만으로 시상을 끌어가지 않고 복합적인 체험을 자유 연상의 기법과 결합하여 현대적 감성으로 변환하는 방법을 구사했다. 삶의 한 국면이 우리가 알 수 없는 경로를 통해 다른 국면과 연결된다는 4차 산업혁명의 아이디어를 도입한 듯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지루하지 않고 고착된 시선에 함몰되지 않는다. 세상의 한정된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도약하려는 감정의 탄력을 지니고 있다.
다채로운 화법과 함께 그가 지닌 유머 감각도 악몽의 음울함을 완충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신호」 같은 시에 보이는 경쾌한 리듬감은 우울한 세상의 습지에서 우리를 건져내 세상의 교차로로 눈길을 돌리게 한다. ‘깜빡’이라는 일상어를 반복하여 나이 들어 쉽게 잊어먹는 속성과 세상의 모순에 힘을 잃고 쓰러지는 인간들의 모습을 병치한 수법이 놀랍다. 「미트볼」은 잡다한 재료가 뒤섞인 미트볼처럼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의 모습을 나열하다가 ‘미트볼’을 변형한 “오, 미트랄랄라!”라는 경쾌한 결말로 종결하여 교묘한 위장의 전환 어법을 구사했다. 이 경쾌한 종결은 일상의 지루함을 견뎌내겠다는 의지로도 읽히고 아무리 경쾌한 위장을 해도 세상의 지루함은 계속될 것이라는 반어로도 읽힌다.
이와 유사하게 「축제」에서는 내부의 갈등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막바지에 이른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망고!”라는 감탄사를 배치한다. 이 감탄사는 연을 날릴 때 얼레의 줄이 다 풀렸다는 뜻도 되면서 옛날 광고에서 “따봉!”하며 축제의 춤을 주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런 이중성에 의해 파멸을 축제로 희화하는 이중의 화법을 구사한 것이다. 「자루는 간다」는 짐승 가죽으로 옷과 장식물을 만들어 즐겁게 향유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표현했는데 표면적 현상을 관통하는 예리한 시선이 살아 있다. 「네모의 효능」은 숨 막히게 붐비는 지하철 객실의 모습을 통해 유령처럼 무의미한 삶의 국면을 보여주다가 가장 번잡한 환승역 신도림역을 “신도림(新桃林)”으로 치환하여 이상향으로 가는 “환생역”으로 바꾸는 기발한 재치의 화법을 구사했다. 이러한 유머 감각은 세상의 어둠에 대항할 만한 힘을 부여하지는 않지만 그 암흑의 수렁에 함몰되지 않으리라는 희망의 암시를 전해준다. 그래서 그 유머 감각이 고맙고 위안이 된다.
정채원의 시집은 삶과 죽음에 대한 다양한 사유를 다채로운 화법으로 표현한 귀중한 작품집이다. 여기 구사된 다채로운 발성과 표현법, 상징과 은유의 새로운 구성만으로도 최근 시단의 중요한 성과로 꼽힐 만하다. 시인의 다채로운 화법과 유머 감각은 관습적 생의 습지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생의 차원으로 도약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시집의 미덕은 개별 작품의 독해를 넘어 시집 전편을 통독할 때 더 포괄적으로 체득된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 작품에서 얻었던 선입견에서 벗어나 시집 전체를 공들여 완독하는 포괄적 이해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시집의 세부를 꼼꼼히 천착하는 섬세한 정독의 노력도 필수적이다. 이러한 전환의 노력에 의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이 시집을 읽으면 그런 의외의 수확도 얻을 수 있다. (끝)
『현대시학』2020년 1 -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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