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세계의 ‘너머’를 위한 ‘지금·여기’의 몸부림
-정채원의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문학동네)
김윤정(평론가)
정채원의 네 번째 시집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에 구현되어 있는 시적 양상은 어느 한 가지로 환원되지 않는 매우 다채롭고 복합적인 것이다. 그의 시에 전면화되어 나타나는 유연하고 폭발적인 상상력은 그 자체로서도 미적 특질을 지니지만 그의 시는 그것이 통어되지 않을 때 범하기 쉬운 가벼움을 비껴가고 있다. 정채원의 시를 지배하는 환유적 이미지들은 그의 시를 세련되고 자유롭게 이끌고 있으되 그의 시는 소위 환유적 시들이 노정하기 마련인 방향 없는 맹목성에 함몰되어 있지 않다. 즉, 정채원의 시에는 전경화되는 미적 특장들의 이면에 정신적 기저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시의 화려한 미적 요소들로 인해 가려지곤 하는 그것은 그러나 그것이 있음으로써 정채원의 시를 여느 난해하면서도 가벼운 시들과 구별시킨다. 정채원의 시의 심층을 가로지르는 정신적 거점은 그의 시를 단순히 미적 화려함과 언어적 유희로 치닫게 하는 대신 이들에 대해 의미와 좌표를 부여하여 이들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 정채원의 시의 저변에 자리하고 있는 심층적 정신성은 굳은 섬유질로서 존재하면서 그의 시의 미적 요소들과 촘촘히 교직되고 있다 할 것이다.
정채원의 경우 미적 요소와 정신적 특질이 만나는 지대는 일상적인 삶이 이루어지는 생활의 영역이다. 시인에게 주어지는 일상의 세계가 곧 시인에게 있어서 미적이고도 정신적인 요소가 충돌하면서 펼쳐지게 되는 지대인 것이다. 정채원에게 생활 세계는 누구에게든지 경험되는 것과 같은 무미하고 건조한 영역이지만 그의 경우 이것은 사실적으로 수용되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는 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생활 영역에 과감히 몸을 던진 채 이를 미적이고도 정신적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문도 모르고 반짝이던 유리 날개들
내 귀불에 매달린 나비 귀걸이와
물빛 노트를 쥐여주고
그가 손을 흔들며 돌아섰을 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
나도 난간에 기대 손을 흔들었지
그가 계단을 다 내려가
문을 열며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나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었을 때
웃으며 한 발 내디뎠지
나는 구르기 시작했지
(중략)
밥을 먹을 때도
동사무소에 갈 때도
잠을 잘 때도
나는 끝없이 계단을 구르고 있지
그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지
문을 닫지 못하고 있지
-「끝없는 계단」 부분
시집의 첫자리에 수록되어 있는 위의 시는 정채원의 시적 구도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에 해당한다. 위 시에서 등장하고 있는 “그”와 “나”의 만남과 그들 사이의 관계는 위 시의 중심 제재가 일상의 한가운데에 놓여있음을 말해준다. 시적 화자가 전하는 “밥을 먹을 때도/ 동사무소에 갈 때도/ 잠을 잘 때도” 이루어지는 사태들은 “내”가 처한 지대가 생활 세계의 그것임을 나타낸다. 위 시의 시적 내용은 이토록 주어진 현재적 생활 영역을 바탕으로 하여 전개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나”의 일상화된 만남은 일상적 시공성을 파괴한 상태 위에서 이루어진다. “나”에게 “반짝이던 유리 날개들”, “나비 귀걸이”, “물빛 노트를 쥐여준” 채 “그”는 “나”의 눈앞에서 영원한 이별의 공간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 “나”와 분리되었을 때, “나”는 제 아무리 “계단을 구르기 시작해”도 “그”에게 도달할 수 없는 조건 속에 놓이게 된다. 멀찍이서 “나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드”는 “그”에게 다가가고자 “구르고” 또 “구르고” “끝없이 계단을 굴”러도 “나”는 결코 “그”와 만날 수 없다. “나”는 영원히 “계단을 구를” 뿐이고 “바닥”은 영원히 저 멀리에 놓여 있다. 이는 “그”와 “나”의 일상적 관계가 영원이라는 비일상적 시공성에 의해 전유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분명 “나”의 시야에 놓여 있을지라도 “그”는 천 길의 영원히 단절된 시공 안에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한 조건 속에서 “나”는 영원히 “바닥에 닿”기를 꿈꾸며 “구르기”를 계속할 것이다.
일상적 사태 속에서 영원성이라는 비일상적 시공성을 조우하는 일은 결코 일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영원한 부재와 단절을 함의할 때 생활 영역은 곧 지옥과 같은 절망의 지대가 될 것이다. 생활 속에 끼어든 비극의 영원성은 자아로 하여금 절대적인 허무 의식 속에 허우적대게 할 것이다. 그것은 곧 생활 세계에 내재하는 극단화된 한계 상황을 상정하게 한다. 그것이 자아에게 닥치는 절대적인 고독과 부정의 사태를 의미함은 물론이다.
정채원의 시에서 현재적 생활 영역이 이같은 비극적 고독감으로 채색되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한평생 도망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그림 속”(「제8병동-복숭아나무 아래」)이라든가, “토슈즈 안에 갇힌 채/ 뒤틀리고 짓무른 발가락”(「고통이 비싼 이유」), “한 시절을 온전히 보전하는 방법은/ 화산재로 덮어버리는 것”(「최후의 날」), “마지막 문장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미발표작」), “누군가에게 내일은 끝내 오지 않는 날”(「귀가」) 등은 시인이 체감하는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절망의 의식들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표현들이다. 이들은 정채원의 시에서 영원의 시간성이 구원과 희망으로 향하는 대신 현재의 비극적이고 허무한 사태와 연루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대목들이다.
시계는 오늘도 소란하게 죽어간다
두 개의 바늘을 제 살에 꽂고
신음소리, 째깍째깍
구름에 매달린 링거는 보이지 않아도
나날이 수액이 줄어들고, 수명이 줄어들고
시간이 마르는 소리에 잠 못 이루는 밤
혼자일수록 더 잘 들리는 시간의 들숨과 날숨
시간 너머로 시간을 보내도
시간의 검은 문은 어김없이 열리겠지
소리 없이 신음하는 자가
더 아프겠지, 피가 마르겠지
잉크가 마르고 있다
써지지 않는 볼펜을 꾹꾹 눌러쓴다
잉크 없이 쓰는 글자가
더 선명하다, 지워지지 않는다
기억 너머로 기억을 보내도
기억은 어김없이 돌아온다. 툭, 툭,
피어나는 봄꽃을 막을 수 있나
-「무음시계」 부분
일상적 사태들이 영원한 시공으로 넘나들며 비극성을 확장시키는 정황은 위 시에 이르러 보다 선명하게 포착되고 있다. “두 개의 바늘을 제 살에 꽂”은 채 “소란하게 죽어가는” “시계”는 시적 자아에게 주어진 시간들이 원천적으로 비극적 국면을 향해 놓여있음을 나타낸다. 시인이 시계 소리를 “신음소리”로, 시간의 흐름을 “수명이 줄어드는” 사태로 묘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잉크가 없어” “써지지 않는 볼펜을 꾹꾹 눌러쓰”는 모습은 시적 자아가 처한 생활 영역들이 온통 황망한 허무의 세계임을 강조한다. 비극으로 점철된 일상의 시간들은 시적 자아의 내적 호흡에 이르러 보다 영구적이고 강력하게 각인된다. “혼자일수록 더 잘 들리는 시간의 들숨과 날숨”은 불행의 시간들이 일순간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더욱 지속적이고 위력적으로 자아를 압도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시간 너머로 시간을 보내도/ 시간의 검은 문은 어김없이 열린”다고 함으로써 시인은 자아를 삼켜버리는 시간의 음험하고 비극적인 속성을 폭로한다. 그것은 생활 영역의 일상적 시간성을 내부에서부터 파열시키는 음산하고 파괴적인 시간성에 해당한다. 이러한 시간성 속에서 자아가 “소리 없이 신음하는” 것은, “피가 마르”도록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정채원 시인이 그려내는 생활 세계의 모습들은 분명 희망적이거나 낙관적이지 않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의 실상은 어둡고 우울하게 채색된 디스토피아의 그것에 가깝다. 그것은 자아의 내적 국면에서 영원하고도 전면적인 시공성을 띠고 확장됨으로써 비극성을 한층 더 강화한다. 이로써 시인이 형상화하는 현재적 세계는 우리에게 출구를 찾을 수 없는 암담하고 처절한 극한 상황으로 다가오곤 하는 것이다.
시인이 그리는 생활 세계가 이토록 허무와 비극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시인의 경험적 불행에 기인하는 것일까 혹은 선험적 인식론에 기대는 것일까? 자신의 시세계에 관하여 언급한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가 “아프고도 황홀한 계단을 끝없이 굴러떨어지”는 것이라 함으로써 그가 구현하는 비극적 세계가 그가 도달코자 하는 궁극적인 지평을 위한 일정한 계기에 해당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시인이 구현하는 비극적 생활상은 시인에게 있어서 현재적 생활 세계 너머의 궁극적 이상을 위해 존립하는 매개적 사안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대신 시인이 추구하는 초월적 지향성에 의해 비로소 의미가 부여되는 종속적 변수라 할 만하거니와, 이는 비극적 세계 인식이야말로 “시를 통해 눈 하나 더 찾게 될까”라는 시인의 말에서 암시되듯 인간의 현재성을 넘어서는 데 기여하는 불가능한 가능성을 위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적어도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그 혹등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혹등고래」)를 알아차리기 위한 시인의 불가결하고도 필사적인 시도와 관련된다는 것이다.
물 밖에도 세상이 있다는 거
살아서 갈 수 없는 곳이라고
그곳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
새끼도 언젠가 알게 되겠지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그 혹등이 없다는 건 아니라는 거
그것도 더 크면 알게 되겠지
어미는 새끼에 젖을 물린 채 열대 바다를 헤엄친다
그런 걸 알게 될 때쯤 새끼는
극지의 얼음 바다를 홀로 헤엄치며
어쩌다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도 있겠지
코고는 소리 윙윙거리는 소리 울음소리 신음 소리가 섞여 긴 노래가 되고
예언처럼 멀고 먼 주름투성이 바다
뻔하고 모호한
젖은 몸뚱이는
이따금 물 밖으로 힘껏 솟구친다
다른 세상을 흘낏 엿보면서
그렇게 숨을 쉬면서
-「혹등고래」 부분
위 시의 “혹등고래”는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서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인식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상징한다. 위 시에서 전하는 바대로 “혹등고래”는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등에 나 있는 혹을 볼 수 없지만, 볼 수 없다는 것이 혹이 있음을 알 수 없다는 것도 또한 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혹등고래”에게 “등의 혹”은 주어진 현재성 이상의 세계에 대한 인식가능성의 의미를 내포하게 된다. 또한 그것은 비록 인지로써 확인할 수는 없으되 현재적 생활 세계 너머에서 자아와 세계가 온전하고 완성된 존재일 수 있다는 믿음을 함의하게 된다.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혹등고래”에게 실제로 “혹등”이 있으며 그 점이야말로 “혹등고래”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그를 완전하게 했던 것처럼, 인간도 눈에 보이는 현재성 너머의 세계로 인해 스스로 인간이라 명명되며 동시에 완전한 존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혹등고래”가 자신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도정들이 있다. 그것은 새끼고래가 어미고래로 성장하는 과정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숱하고 오랜 인내와 시련의 시간들로 채워지게 될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극지의 얼음 바다”는 물론 “멀고 먼 주름투성이 바다”를 헤매며 “홀로 헤엄치”는 험난한 여정을 포함하는 것이자 그 속에서의 온갖 “코고는 소리 윙윙거리는 소리 울음소리 신음 소리가 섞여 노래가 되”는 경험을 아우르는 것이다. 항구적인 “젖은 몸뚱이”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뻔한” 것이자 생활 세계가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해 뚜렷한 이유와 목적도 알 수 없는 “모호한” 국면들을 나타낼 것이다.
숙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 “혹등고래”의 이같은 사정은 정채원 시인이 자신의 시쓰기가 “안 보이는 걸 보려고/ 가뭇없이 사라지는 걸 말하려고/ 도망치듯 온”(「시인의 말」) 과정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 대목을 상기시킨다. “혹등고래”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한 믿음을 얻기 위해 험한 항해의 여정을 거쳐야 하듯 시인의 시쓰기 역시 “안 보이는 걸 보려”는 의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고통의 행적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혹등고래”의 생리가 그러하듯 시인의 시쓰기는 한계를 넘어서 확장된 인식의 지평을 열기 위한 고투에 해당하거니와, 이는 곧 지금·여기라는 생활 세계를 딛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시인의 뜨거운 의지를 나타낸다. 그것이 하강을 의미할지라도 시인이 기꺼이 비극적 숙명의 한가운데로 진입하여 생의 극한의 사태를 응시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어른이 된 “혹등고래”라 하여 자신의 존재론적 조건을 떠나 “물 밖 세상”에 당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시인이 비극적 국면을 수용하는 일이 초월과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혹등고래”가 “다른 세상을 흘낏 엿보면서” “물 밖으로 힘껏 솟구치듯” 시인 역시 생활 세계에 관한 응시를 저버리지 않을 때 인간의 한계 내 조건을 초극하고자 하는 열정을 구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치 “숨을 쉬”는 일과 다름없이 말이다. 이는 시인이 말한바 “와이퍼”처럼 “쉬지 않고 부정과 긍정 사이의 오가”(「파라다이스 리조트」)는 일에 필적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부대낌을 통해 시인은 살아 있는 내내 힘겨울 것이되 그 속에서 비로소 평생토록 타오르는 생의 에너지를 길어 올리게 될 것이다.
정채원이 인식하는 생의 실상은 이처럼 인간의 한계에 닿아 있는 것이다. 그는 부여된 조건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와 관련한 질문을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그의 질문들이 인간 존재의 현재성을 인식하게 하고 이에 대한 초월에의 지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시는 정신적이다. 특히 정채원 시인에게 이러한 과정은 결코 단선적이거나 관념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시인의 시쓰기가 이러한 과정 내부에서 전개되는 치열한 고투의 흔적이라는 점에 기인한다. 삶의 비극성이 극점에 이를수록 이에 대한 초극에의 의지는 더욱 가속될 것인바, 이 지점이야말로 시인의 미학적 고구가 팽창하듯 솟구치는 지대가 될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현재적 생활 영역을 기반으로 하여 빚어진 정채원의 시가 아름답고도 정신적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시와표현』 2020년 봄호
김윤정 문학평론가
2007년 <시현실> 등단. 저서에 『불확정성의 시학』, 『기억을 위한 기록의 비평』, 『한국 현대시 사상 연구』, 『위상시학』 등. 현재 강릉원주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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