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제4시집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

파타 모르가나* 평설/김윤정, 시작노트/정채원

Beyond 정채원 2020. 8. 28. 01:31

파타 모르가나*

 

 

정채원

 

 

여름에는 내 피로 너를 만들었고

겨울에는 뼛가루로 너를 만들었다

 

아니,

여름에는 얼음으로 너를 만들었고

겨울에는 모래로, 모래바람으로 너를

만들었다, 되도록 빨리 지워지는 너를

 

길 잃은 사막에서 쓰러지기 직전 나타나는

신기루 속의 신기루

달려가 잡으면 가시풀 한 줌으로 흩어지는

너를 알면서도

그런 줄 알기에 더 놓지 못했다

 

철창에 갇혀 온종일 커피 열매만 먹는 사향고양이는

오늘도 피똥 아니, 커피똥을 싼다

수도 없이 창자벽에 제 머리를 박으며

캄캄한 내장 속에서 발효된 내 편지는

차가운 혀를 사로잡을 만큼 중의적일까

 

하늘에 뜨는 태양과

바다에 뜨는 태양이 서로 마주보며

너, 가짜지?

얼굴을 붉히는 동안

 

한 걸음 다가가면 두 걸음 뒤로 물러나다

내장을 거칠 겨를도 없이

해가 지면 모든 게 지워지고

주름진 백지만 남게 되더라도

 

북극 얼음바다 위에 떠 있는 마법의 성을 향해

구절양장을 건너가는 우리에게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오늘은 얼음을 뚫고 뜨거운 커피가 솟구칠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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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ta Morgana : 마녀 모르간 또는 신기루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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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의 의지를 포착하는 이채로운 시선의 자리

 

 

  정채원의 시를 지배하는 가장 주요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대상을 관찰하는 독특한 각도의 시선이다. 그것은 독자의 앞에 오롯이 자리하면서 그의 시에 다가가는 길목이 된다. 당당히 버티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그 시선은 때로 그가 바라보는 대상과 독자 사이를 가로막는 장막이 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선은 고유하지만 고독하고, 섬세하지만 배타적이다. 이러한 사정은 그의 시에 대한 독자의 감정이입을 방해한다. 대신 시는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인해 잔잔하고 고요해진다. 그의 시는 냉정하리만큼 담담하다. 그의 시가 아득히 멀다는 느낌은 그러한 점에서 비롯한다.

 

  어쩌면 시인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시선을 드리울 자리를 찾아들어간다. 그리고 그러한 자리를 찾았을 때 비로소 시인은 대상을 향한 시의 그림을 그린다. 시인이 그린 시의 그림이 생소하면서도 신비스러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정통적인 시의 예술가다. 시가 이룩할 수 있는 예술의 경지를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정채원의 시라 할 수 있다. 그의 시선은 대상이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지점을 찾는 예술가의 그것이다.

 

  하지만 대상이 지닌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외적인 것인가 내적인 것인가. 정채원 시의 독자성은 이와 관련될 것인데, 그의 시가 사실적이고도 환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은 그가 시의 회화성에 주력한 것으로 보이도록 한다. 그러나 그는 대상을 시각적으로 전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대상이 지닌 내적 본질을 응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존재가 유한성을 초극하기 위해 필사적인 고투를 펼쳐내는 지점이다. 정채원의 고유한 시선은 곧 시적 대상이 꿈틀대듯 몸부림치면서 그것이 생명의 드라마로 펼쳐지는 지대와 관련된다. 정채원 시인이 구하는 것은 굴레에 갇힌 존재의 운명과, 동시에 그가 보여주는 생명성의 국면이다. 시인은 이를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감정을 내세우는 대신 끊임없이 대상을 향한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그의 시선은 시적 대상이 보여주는 생명의 몸짓이 온통 아름다움의 그것이 될 수 있는 순간을 마주하기 위해 할애된다.

 

  ‘마녀 모르간 또는 신기루’라는 작가의 주석을 달고 있는 위 시의 제목만큼 ‘Fata Morgana’는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마녀 모르간’이라는 어휘 자체가 일으키는 비실재감과 더불어 시는 환상적인 이미지로 채색되어 있다. 시가 지닌 이와 같은 환상성은 시를 난해하게 한다. 그러나 정채원의 시를 단지 유미주의자의 그것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은 대상의 본질을 응시하고자 하는 시인의 시선 때문이다. 위 시에서 시적 대상은 ‘신기루’와 같은 공허한 것일지라도 시인에게 그것은 명백히 실재한다. 시인의 시선은 독자의 눈에 설기만 한 대상을 선명한 실재의 것으로 본다. 실상 시인은 있지도 않은 대상을 스스로 빚어내고 숨을 불어넣어 실재하는 것으로 존립시킨다. ‘여름에는 내 피로’, ‘겨울에는 뼛가루로’ ‘너를 만들었다’고 시의 화자는 말하는 것이다. 시에서 ‘신기루’의 환상적 이미지는 유희의 끝자락에서 공허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실존에 의해 필사적으로 창조된다.

 

  그러나 만들어진 ‘너’는 ‘나’의 ‘피와 뼈’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너’를 구성하는 재질은 ‘얼음’과 ‘모래’와 ‘모래바람’이기 때문이다. ‘여름’의 ‘얼음’과 ‘겨울’의 ‘모래, 모래바람’이 상징하는 것은 소멸할 운명의 그것이라는 점이다. 화자가 말하듯 그것은 ‘빨리 지워질’ 것이다. 창조를 위한 뜨거운 의지에 의해 탄생한 것이지만 그것은 영원할 수 없는 운명 또한 지니고 있다. 뼈로 만들어지되 모래바람처럼 허망하다는 사실로 인해 그것은 ‘신기루’라 명명된다. 그리고 이것은 신 앞에 놓인 유한자의 운명을 대변한다. 위 시에서 시인의 시선이 자리하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신의 그림자 위에서 대상이 전경화되는 곳, 시적 대상의 유한성이 도드라져 보이는 곳이 시인의 시선이 자리하는 지점이다. 위 시의 화자가 ‘달려가 잡으면 가시풀 한 줌으로 흩어지는/ 너를 알면서도/ 그런 줄 알기에 더 놓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존재의 유한성은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만큼 쉽게 방기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포기가 아니라 몸부림이다. 인간은 유한성으로 인해 무력한 대신 유한하기 때문에 치열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상을 향한 연민 가득한 위 시의 시선은 유한한 존재를 응시하는 절대적 존재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철창에 갇혀 온종일 커피 열매만 먹다’가 ‘커피똥을 싸는 사향고양이’는 자신에게 씌워진 굴레를 견디려고 버둥거리는 유한한 존재의 모습이다. 이러한 생존의 조건을 가리켜 시인은 ‘수도 없이 창자벽에 제 머리를 박으며/ 캄캄한 내장 속에서 발효된 내 편지’라고 형상화하고 있거니와, 이는 유한한 존재가 놓인 극한의 상황을 안타까움으로 바라보는 초월적인 시선에 의한 것이다.

 

⸻계간 《시현실》 201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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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정 / 문학평론가. 2007년 《시현실》로 등단. 저서 『한국 현대시와 구원의 담론』 『문학비평과 시대정신』 『불확정성의 시학』 등. 현재 강릉원주대 국문과 교수.

 

 

 

  「시작노트」

  겹겹의 불꽃

 

  정채원

 

  극지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는 1906년에 극지를 탐험하면서 북극 산맥을 목격했다고 보고했다. "망원경을 통해 보이는 그 광경에 나는 감동과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7년 뒤 자연사박물관의 탐험대가 크로커랜드를 찾아 나섰을 때, 그들은 피어리가 본 것과 똑같은 신기루만 보고 돌아왔다.

 

  다양한 밀도의 대기층이 겹겹의 렌즈처럼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극지 탐험에 지친 우리들을 사로잡는다. 북극의 끝없는 얼음 위에 떠 있는 히말라야처럼 말이다. 우리가 다가가면 산맥은 자꾸 뒤로 물러나다가 해가 지면 끝없는 얼음바다만 펼쳐지겠지. 마녀 모르간이 맘만 먹으면 펼쳐 보이는 세상에 속는 척 빠져보면 어떨까? 가짜가 진짜고 진짜가 가짜인 세상. 가짜인 줄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함께 낄낄대며 건너가는 유쾌한 세상. 끊임없이 출렁이는 파동으로 존재하다가 내가 휙 돌아볼 때만 입자로 존재하는 너처럼, 나처럼, 詩처럼.

 

  ㅡ문학동네시인선 100 기념 티저시집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