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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의 세계/김두안 시집

Beyond 정채원 2020. 8. 15. 22:53

   환월幻月

 

 

   나는 어떻게 달에 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 거대한 강가에는 창문이 없는 빈집과 모래 위에 까

마귀 화석이 서 있다

 

   나는 소란이 떠난 마을을 바라본다  밝지도 어둡지도

못한 불면의 경계에서 달의 멸망한 시간을 생각한다

 

   어느 날 까마귀의 예언처럼 강가에서 희고 거룩한 고

요의 종교가 발견됐다 부패한 구름은 지상으로 내려와

층층이 얼어 버렸으며 청동색 별이 무수히 지워졌다 사

람들은 스스로 혓바닥을 삼키고 돌 틈에 작은 붓꽃을

심었다 그리고 모두 강을 건너가 빙하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도 침묵의 강가에는

   종단으로부터 이탈한 자를 쫓는 짐승처럼 검은 바위

들이 서 있다

 

   지상의 종교가 죽음 이후 시간과

   빛의 탄생을 약속했듯

   빙하 속에서 사람들 목소리가 반사된다

 

   나는 또 몇 번의 생을 거슬러 와 이 거대한 멸망의 강

가에서 빈집의 문을 연다 나무는 흔들리지 않고 노란 붓

꽃에서 눈물 냄새가 난다

 

   나는 그토록 바라보았던 달에 와서 환생의 기억을 꿈

꾼다

 

   고요로부터 도망친

   눈동자에

   달의 환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칼의 진술

 

 

   칼이 감쪽같이 살을 도려내고

   숭어를 살려 주었다

 

   빨간 등뼈가 서서히

   꼬리를 흔들며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사랑해?

   칼이 슥ㅡ

   단 한마디로 고백을 요구했다

 

   나는 상처를 잊으려고

   고통을 깨우며 살았다

   칼이 양면의 날로 말했다

 

   오늘은 해안에 밀려온

   구름 그림자로

   칼날의 피를 씻는다

 

   도마 위에서 칼이 악몽을 꾸고 있다

   핏기 하나 없는 햇빛이

   칼날 속에서 스며 나온다

 

   가끔 너의 내부에서

   발견된 침묵이 섬뜩하다

 

 

 

 

김두안 시집(시인수첩 시인선 027), 제4회 한유성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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