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책소식

블랙 코드/박완호

Beyond 정채원 2020. 12. 9. 00:43

블랙 코드

 

검은 라벨이 붙은 술 하나를 선물 받았다

 

도무지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어둠 속에 잠긴 발자국 같은

찰나의 침묵,

 

소란스럽게 짖어대는 개들의

당당한 비겁 너머

는개 나부끼는 새벽이

소리 없이 다가서고 있었다

 

별을  그리는 사람은 별이 되고

꽃을 노래하는 사람은 꽃으로 태어난다는 소문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검은 라벨이 달린 술병에 든

달콤한 낙담을 거푸 들이켜 가며

때로는 삶을 때로는 죽음을 꿈꾸는

이곳에서의 기억은 곧 새까맣게 지워질 것이다

 

새까맣게 된다는 건

가장 깨끗해지는 일,

 

꽃도 별도 되지 못한 이름들

하나둘 스러져가는 이곳에서

 

당당한 비겁보다도 못한

정의는 얼마나 눈부시던가?

 

검은 꿈을 꾸는 정신 속을 파고들지 못하는 빛, 빛들이

 

검은 라벨을 달고 거대한 침묵으로 태어나는 밤, 나는

 

더는 어떤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어떤 꿈도 더는

나를 가두지 못할 것이다

 

 

 

 

박완호 시집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시인동네 시인선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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