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비평·에세이

전수오의 「행간의 유령」 / 이수명

Beyond 정채원 2023. 7. 21. 13:46

 

 

행간의 유령 

 

전수오

 

무심코 낙서를 한다

종이 위에

물고기 몇 마리를 그린다

잠시

비눗방울 날리는

밖을

바라보다가

종이를 다시 보니

물고기가 없다

너는 산 것

너는 죽은 것

정해주기도 전에

잃어버린 것과 잊어버린 것

어스름에

내 뒤에서 잠깐

희미하게 웃을 것이다

빈 종이 위에

얼룩진 빛이 욱신거린다

 

시집 빛의 체인』 202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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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익숙한 오후 시간이다이를테면 커피를 마시며전화 통화를 하며빛이 실내에 들어오는 것을 보며 무심하게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오후다오늘은 물고기 몇 마리를 그린다”. 어떤 물고기들인지다 완성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물고기들이 무엇을 하는 모습이었을까고개를 들면 밖에는 비눗방울이 날린다비눗방울 또한 누가 날리는 것인지어디서 온 것인지진짜 비눗방울인지 알 수 없다그런데 종이를 다시 보니 물고기가 없다”.

   그리다 만 물고기혹은 다 그린 물고기일지라도 이렇게 쉽게 잃어버린다잊어버린다그러면 무엇을 그렸는지도 알 수 없게 된다정말 물고기를 그린 것일까 묻게 된다. “잃어버린 것과 잊어버린 것물고기와 물고기 비슷한 것들이종이를 떠나 희미하게” 돌아다닌다내가 가진 것은 빈 종이일 뿐이다

 

이수명(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