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의 유령
전수오
무심코 낙서를 한다
종이 위에
물고기 몇 마리를 그린다
잠시
비눗방울 날리는
밖을
바라보다가
종이를 다시 보니
물고기가 없다
너는 산 것
너는 죽은 것
정해주기도 전에
잃어버린 것과 잊어버린 것
어스름에
내 뒤에서 잠깐
희미하게 웃을 것이다
빈 종이 위에
얼룩진 빛이 욱신거린다
‒시집 『빛의 체인』 202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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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익숙한 오후 시간이다. 이를테면 커피를 마시며, 전화 통화를 하며, 빛이 실내에 들어오는 것을 보며 무심하게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오후다. 오늘은 “물고기 몇 마리를 그린다”. 어떤 물고기들인지, 다 완성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물고기들이 무엇을 하는 모습이었을까. 고개를 들면 밖에는 비눗방울이 날린다. 비눗방울 또한 누가 날리는 것인지, 어디서 온 것인지, 진짜 비눗방울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종이를 다시 보니 물고기가 없다”.
그리다 만 물고기, 혹은 다 그린 물고기일지라도 이렇게 쉽게 잃어버린다. 잊어버린다. 그러면 무엇을 그렸는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정말 물고기를 그린 것일까 묻게 된다. “잃어버린 것과 잊어버린 것”이, 물고기와 물고기 비슷한 것들이, 종이를 떠나 “희미하게” 돌아다닌다. 내가 가진 것은 “빈 종이”일 뿐이다.
이수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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