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에 남아
박소란
우물은 깊고 고요하다
먼 옛날
쓸쓸한 사람 하나 빠져 죽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안다 누구도 죽지 않았다는 걸
죽음은 구멍 난 이파리처럼 가볍다
시간이 꾸며낸 이야기 속에서
야윈 돌배나무가 몇 개의 고단한 얼굴을 떨어뜨린다
아무런 마음도 품지 않은
돌배는 쓰지도 달지도 않을 것이다
돌배는 우물 속으로 홀린 듯 굴러
헤엄을 칠 것이다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기도 할 것이다
쓸쓸한 사람 하나 빠져 죽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결코 사실이 아니고
혼자 걷던 누군가 우연히 우물을 발견한 뒤
손에 쥔 텀블러 가득 다디단 물을 길어 담는다
물 쪽으로 한껏 허리를 구부린 그의 뒷모습은 얼핏
위험한 곡예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안다
그가 무사히 물을 길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것을
이끼 낀 나의 등을 쓸며
한 모금 마셔 봐요, 다정한 인사를 건넬 것을
숨을 죽인 채
우물가를 서성이는 이들이 그 광경을 지켜본다
지친 몸을 씻고 시든 푸성귀를 다듬는다
돌배나무 아래 누워 곤히 잠든다 사나운 꿈이 다 마를
때까지
바람은 구전될 것이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쓸쓸한 사람 하나 빠져 죽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우물은 깊고 고요하다
여전히
물이 괸다
우물 가까이 다가서면
우물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점점이 떠오르는 얼굴
《현대시학》 2024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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