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물가에 남아/박소란

Beyond 정채원 2024. 1. 21. 17:24

   물가에 남아

 

   박소란

 

   우물은 깊고 고요하다

   먼 옛날

   쓸쓸한 사람 하나 빠져 죽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안다 누구도 죽지 않았다는 걸

 

   죽음은 구멍 난 이파리처럼 가볍다

   시간이 꾸며낸 이야기 속에서

 

   야윈 돌배나무가 몇 개의 고단한 얼굴을 떨어뜨린다

   아무런 마음도 품지 않은

   돌배는 쓰지도 달지도 않을 것이다

   

   돌배는 우물 속으로 홀린 듯 굴러

   헤엄을 칠 것이다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기도 할 것이다

 

   쓸쓸한 사람 하나 빠져 죽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결코 사실이 아니고

 

   혼자 걷던 누군가 우연히 우물을 발견한 뒤

   손에 쥔 텀블러 가득 다디단 물을 길어 담는다

   물 쪽으로 한껏 허리를 구부린 그의 뒷모습은 얼핏

위험한 곡예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안다

   그가 무사히 물을 길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것을

  

   이끼 낀 나의 등을 쓸며

   한 모금 마셔 봐요, 다정한 인사를 건넬 것을

 

   숨을 죽인 채

   우물가를 서성이는 이들이 그 광경을 지켜본다

 

   지친 몸을 씻고 시든 푸성귀를 다듬는다

   돌배나무 아래 누워 곤히 잠든다 사나운 꿈이 다 마를 

때까지

 

   바람은 구전될 것이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쓸쓸한 사람 하나 빠져 죽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우물은 깊고 고요하다

   여전히

   물이 괸다

 

   우물 가까이 다가서면

   우물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점점이 떠오르는 얼굴

 

 

 

《현대시학》 2024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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