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히 붉다
김명리
일몰 무렵 천변의
마구잡이 뒤엉킨 풀숲 가에
작은 고양이 한 마리 죽은 듯이 엎드려 있다
아가야 부르며 다가가니
활시위 마냥 등뼈를 곧추세우며
빤히 나를 쳐다보는데 아아, 한쪽 눈
움푹 팬 눈구멍 속의
눈자위가 없다! 눈동자가 없다!
이렇게나 투명한 붉은 빛을 보았나
움푹 팬 눈구멍 속으로
거대한 일몰이 들어가 앉았다
눈물자국 대신 묵시록을
접힌 데 없는 광대무변을 꽃피웠다 완연히 붉다
《현대시학》 202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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