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악*
강영은
공동묘지 지나 닭 모가지 비트는 토종닭집 지나 벼슬 없는 닭처럼 이승에 든다.
삼나무, 팽나무, 새덕이, 죽나무, 생달나무, 참식나무, 꽝꽝나무, 산딸나무, 산뽕나무, 굴거리나무, 사스레피나무, 개서어나무, 개섬벚나무, 윤노리나무, 터널을 이룬 숲속에서
이름 없는 산새처럼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건너간다.
제주 산수국, 보라빛 꽃망울 들인 허파과리가 부푸는데 이승에서 이승을 맛보고 싶은 여러 겹의 육신들, 저승을 다녀온 것처럼 왁자지껄 다가온다.
이승에서 이승이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대며 다가온다. 혼자 걸으니 무섭지 않나요? 탁탁거리는 스틱들, 배낭 없는 나를 무거워한다.
살쾡이 한 마리, 키 낮춰 숲길 건넌다. 마음을 할퀴고 가는 생각이 이승이라면, 세상 같은 건 가까이할 필요 없다고, 어둑한 곳에 몸을 숨긴 네 마음 내 마음이 저승일 것이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듯, 몸과 마음이 살쾡이 뒤를 쫓는 이승의 중간에서 불타는 시절의 악(岳)을 만난다.
뜨거운 전생을 넘은 돌의 침묵에 마음의 입술마저 내어주는 길,
여기저기 놓여있는 화산석 위에 빽빽이 모여 시간 키운 나무들, 땅속으로 기어든 발자국 무량하다.
헐벗은 뿌리 돌 위에 드러내놓고 겹겹 죽음을 끌어안은 저, 무량수전(無量壽殿), 초록 잎사귀들의 극락(極樂)이다.
나비 한 마리, 앞장서 날아가는 이승의 끝에서 이승을 본다. 나, 돌아가는 길 슬프지 않겠다.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에 있는 기생화산.
《문학청춘》 202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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