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밤의 네 번째 서랍

열흘 간의 유령/강정

Beyond 정채원 2025. 4. 27. 08:38

열흘 간의 유령

 

 강 정

 

 

사진 속 얼굴을 연필로 그리고 있자니,

지금 어딘가 살아 있을 낯선 사람이

나보다 먼저 살다 간 내 할머니 같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젊은 여인이

오래전에 나를 보았다고 한다

내 이름이 낯설어지고

건물들의 등고선이 세 배나 내려앉는다

 

잘 다니던 길에 노란 무덤들이 봉긋하다

거기 걸터앉아 술이나 한잔 마실까 하는데

태양이 뚜벅뚜벅 네 다리로 걸어와

무릎을 조아린다

 

길 잃은 개의 눈을 바라보듯

흑점을 가만 보자니,

수백 년 전 누가 그린 그림 속 천사의 날개가 불타고 있다

 

술잔에 옮긴 불덩이가 빛의 사다리를 따라

다시 하늘로 오른다

사흘 동안의 기억이 재가 되어 흩날리다가

무덤가 동그란 돌멩이 되어 오늘 내 방에 구르고

 

또 다른 사흘 동안 주고받은 말들이

거울 속에서 피를 흘린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났더니 그림 속 얼굴이 하얗게 웃는다

또 사흘 동안 가위에 눌려

낮밤이 서로 다른 각도로 집의 골격을 비트는 동안,

웃음 짓던 할머니가 나보다 어린 여인이 되어 내 침대에서 자고 있다

 

하루가 더 지났다

열흘 간 한숨도 못 잤지만 정신이 빙점에 달했다

 

추웠고 무서웠다

웃기고 서글펐다

 

그림 속 얼굴을 본다

 

형체는 사라지고 둥그런 윤곽만 또렷하게 다른 얼굴을 그려 넣어 달라 한다

 

나는 다만 점 하나를 찍었다

가라앉았던 등고선이 흰 비행운을 그리며 모든 풍경을 태양 속에 욱여넣는다

 

내가 정말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아

어느 거릴 가든 그 누구도 내 모습 보지 못할 것이다

 

 

계간 《시와 사상》 2024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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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 1971년 부산 출생. 19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 『처형극장』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키스』 『활』 『귀신』 『백치의 산수』 『그리고 나는 눈먼 자가 되었다』 『커다란 하양으로』 등. 문화비평집 『루트와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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