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간의 유령
강 정
사진 속 얼굴을 연필로 그리고 있자니,
지금 어딘가 살아 있을 낯선 사람이
나보다 먼저 살다 간 내 할머니 같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젊은 여인이
오래전에 나를 보았다고 한다
내 이름이 낯설어지고
건물들의 등고선이 세 배나 내려앉는다
잘 다니던 길에 노란 무덤들이 봉긋하다
거기 걸터앉아 술이나 한잔 마실까 하는데
태양이 뚜벅뚜벅 네 다리로 걸어와
무릎을 조아린다
길 잃은 개의 눈을 바라보듯
흑점을 가만 보자니,
수백 년 전 누가 그린 그림 속 천사의 날개가 불타고 있다
술잔에 옮긴 불덩이가 빛의 사다리를 따라
다시 하늘로 오른다
사흘 동안의 기억이 재가 되어 흩날리다가
무덤가 동그란 돌멩이 되어 오늘 내 방에 구르고
또 다른 사흘 동안 주고받은 말들이
거울 속에서 피를 흘린다
그림을 다 그리고 났더니 그림 속 얼굴이 하얗게 웃는다
또 사흘 동안 가위에 눌려
낮밤이 서로 다른 각도로 집의 골격을 비트는 동안,
웃음 짓던 할머니가 나보다 어린 여인이 되어 내 침대에서 자고 있다
하루가 더 지났다
열흘 간 한숨도 못 잤지만 정신이 빙점에 달했다
추웠고 무서웠다
웃기고 서글펐다
그림 속 얼굴을 본다
형체는 사라지고 둥그런 윤곽만 또렷하게 다른 얼굴을 그려 넣어 달라 한다
나는 다만 점 하나를 찍었다
가라앉았던 등고선이 흰 비행운을 그리며 모든 풍경을 태양 속에 욱여넣는다
내가 정말 그녀를 사랑했던 것 같아
어느 거릴 가든 그 누구도 내 모습 보지 못할 것이다
계간 《시와 사상》 2024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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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 / 1971년 부산 출생. 19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 『처형극장』 『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 『키스』 『활』 『귀신』 『백치의 산수』 『그리고 나는 눈먼 자가 되었다』 『커다란 하양으로』 등. 문화비평집 『루트와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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